[시베리아들 달린다]'21세기 실크로드'에 미래가…

  • 입력 2000년 9월 3일 18시 47분


《남북 분단으로 잊혀졌던 또 다른 대륙 시베리아가 남북 화해의 바람과 함께 망각의 저편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까지 9300㎞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TSR)’가 남북한 철도와 연결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부산발 열차가 유럽까지 달리게 되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21세기의 실크로드’로 거듭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망각의 대륙’ 시베리아는 한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꿈의 대륙’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동아일보사 ‘21세기 평화재단’은 한―러 수교 10주년(9월30일)을 앞두고 서울대 러시아연구소, KBS와 함께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7월4일부터 24일까지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역. 수도 모스크바까지 장장 9300㎞를 달리는 시베리아횡단열차(TSR)가 시작되는 곳이다. 경원선이 이어지면 부산을 출발한 기차가 두만강을 건너와 이곳에서 TSR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러시아호는 꼬박 6박7일을 달려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오케안(대양)호는 13시간30분을 달려 하바로프스크까지 간다. 모두 시베리아의 광활함을 실감케 하는 여정이다.

▼관련기사▼
[시베리아를 달린다]하 용출/"잠재력 다시보자"
[시베리아를 달린다]러 하산역 북한行 열차 들락날락
[시베리아 횡단열차]1961년 완공된 세계최장 복선전철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는 지구의 3분의 1을 돌아가는 TSR의 첫 역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아담하다.

그러나 대장정의 꿈에 부푼 사람들이 넘친다. 중국인 ‘보따리 장사부대’,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는 태평양함대의 수병, 도시에 사는 자식을 만나러 왔다가 시베리아 벽촌으로 돌아가는 촌로, 오붓한 기차여행을 즐기려는 연인들. 매년 1억5424만명이 갖가지 사연을 품고 TSR를 이용한다.

TSR의 요금은 기차 종류와 좌석, 계절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상상외로 싸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4인실을 이용하면 단돈 1000루블(약 4만2000원). 비행기 요금의 7분의 1에 불과하다. 6인실이나 침대가 없는 칸은 훨씬 더 싸기 때문에 보통 러시아인들에게 TSR는 없어서는 안될 젖줄이다.

승객 가운데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 등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미국인 마이클 번즈는 어릴 때부터의 꿈인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하기 위해 일본을 거쳐야 하는 불편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설렌 표정이다.

한번 타면 며칠씩 기차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승객들은 짐이 많다.

긴 여행이라 어려운 점도 있다. 화장실에 세면대밖에 없어 샤워를 할 수 없고 식당차가 있어 끼니걱정은 없지만 비슷한 음식에 질리기 일쑤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들이 밤낮을 달리는 여행길에서 친구가 되는 추억이나 아름다운 시베리아 풍경은 웬만한 불편을 잊게 한다.

극동 러시아지역의 철도를 관할하는 철도부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 빅토르 가브리코프 부소장은 “한반도와 연결되면 TSR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동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80년대에 북한과의 국경역인 하산역장으로 3년 동안 근무했다는 가브리코프 부소장은 남북한 철도복원 소식에 감회가 깊은 듯했다.

러시아의 철도는 광궤(1520㎜)로 표준궤(1435㎜)인 남북한 철도보다 궤도가 넓다. 또 TSR는 전 구역이 전철화됐다. 그러나 가브리코프 부소장은 “궤도 차이 때문에 화물을 옮겨 싣는 것이 번거롭지만 기술적으로 큰 문제는 되지 않으며 TSR는 디젤 전동차도 다닐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며 거듭 “네트 프라블레마(문제없다)”라고 말했다.

19세기 공격적인 동진정책에 의해 건설된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름은 동방(보스토크)을 정복(블라디)한다는 데서 나왔다. 경원선이 복원돼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이곳을 거쳐 시베리아를 달려 유럽대륙까지 갈 수 있게 되면 이름처럼 블라디보스토크가 유라시아대륙의 물류를 장악하는 한 축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인구 65만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무거운 분위기의 여느 러시아 도시들과 달리 활력과 긴장이 넘친다. 연해주정부의 블라디미르 스테니 대외경제담당 부지사는 “이미 시장경제의 틀이 잡혔다”며 “앞으로 모스크바보다 가까운 한국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같은 경제권에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유망할 것 같아 딸에게 한국어를 전공하라고 권했다”고 털어놓았다.

스테니 부지사의 딸 다랴가 다니는 극동국립대학은 1900년대에 한국관련학과를 설치했을 정도로 한국학의 전통이 깊다. 이곳에서 한국관련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학문보다는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다. 한국경제학과 3학년인 이고리 미하일렌코는 졸업 후 한국기업과 합작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극동의 러시아 젊은이들도 이념의 시대가 가고 무한경쟁의 경제전쟁시대가 열린 것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