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은 억압할수 없는 민족" 조선총독부 日간부 육성기록

  • 입력 2000년 8월 7일 23시 40분


《아사히신문은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계기로 8월부터 2002년 여름까지 2년간에 걸쳐 한일관계를 재조명하는 장기 기획기사를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에 공개한 ‘조선총독부 간부 등의 식민지배에 대한 육성기록’은 이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4월 이후 편집국 사회부에 7명의기자로 구성된 ‘일한문제 특별취재반’을 가동하고있다. 이 특별취재팀은 앞으로 한일간의 과거 현재미래를 차례로 점검하는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아사히신문측은 “이번 장기 시리즈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한일 양국이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시도”라고 밝혔다.》

조선총독부에서 간부를 지냈던 이들이 증언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없다.

▽조선총독부의 위상〓조선총독은 천황 직속이었다. 천황을 대리해 일본국의 일부인 조선을 관할했다. 따라서 대신보다 중요한 권한과 권위를 부여받고 있었다. 1년 이하의 징역 처분권은 총독의 재량이었다. 일본에서는 내각의 재가를 얻어야 하는 사항이었다. 따라서 조선총독은 다른 성청의 대신보다 한 단계 위였다. 일본 전반의 국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 조선총독은 맘대로 할 수 있었다.(하기와라 히코조·荻原彦三 총무국 문서과장)

▽조선의 장래〓조선의 장래에 관해 생각할 때 ‘식민지란 과일 같은 것이어서 열매가 맺히면 떨어진다’고 여겼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처럼 연방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별도의 국가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처럼 연방제 형태로 만들어 나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오노 료쿠이치로·大野綠一郞 정무총감)

▽민족운동〓미나미(南)총독의 내지(일본 본토를 지칭)연장주의, 내지화 정책에 대해 우리들은 비판적이었다. 구체적인 것이 창씨개명이다. 취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은 졸렬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경찰직에 있던 이들은 조선민족의 반항은 도저히 억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장래에는 확대될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정치형태를 취할 것인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조선인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는 조선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내심 생각했다.(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

▽조선인의 행복론〓조선인의 젊은 층 가운데 ‘진보파’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만나고 싶다는 말이 들어왔다. 경찰당국은 그들에 대해 상당히 색안경을 끼고 봤다. 나는 그런 것에 괘념치 않았다. 공직에 있던 젊은 일본인 동료 10여명과 함께 그들을 만나보니 생각이 우리와 딴판이었다.

우리는 합방 전보다는 조선인의 생활과 교육이 상당히 나아져 보다 문화적으로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물질적인 행복은 제2, 제3의 문제다. 마음의 행복을 희망한다. 생활이 힘들어도, 식량이 부족해도, 자기나라는 자기 손으로 꾸려가고 싶다’는 식으로 따지고 들었다.

우리들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달라. 조선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있었다면 합병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보면 다른 세력에게 침략받을 위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지금도 그런 위험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자위를 위하여 조선을 합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하고 대응했다.(나카라이 기요시·半井淸 학무국 종교과장)

▽교육정책〓3·1운동 후에 조선에도 대학이 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꽤 있었다. 당시 우리 대부분은 ‘조선에 대학이 생기면 농업대학이 첫 번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반대했다. 당시 조선인들의 분위기는 어떻게 하든 일본의 관립이나 사립대학 문과계로 진학하려 했다. 24년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자 안팎에서 비판이 있었다. 총감은 ‘시류가 그런데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조선인 사이에는 ‘일본을 밀어붙여 교육을 일으키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란 말이 나돌았다.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일으키면 반드시 독립하게 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와타나베 도요히코·渡邊豊日子 학무국장)

▽강우규(姜宇圭·사이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뒤 체포돼 순국)의사의 기개와 조선인 순사경계〓그를 취조할 때 일이다. 그는 취조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를 두드리며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 노인이라 숨이 찼던지 “물을 줄 수 없나”라고 해서 줬다. 맛있게 마시고 나서는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약 1시간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말을 끝내자 나는 한마디만 물었다. “공범자가 있나”라고. 그러자 그는 “이처럼 큰 일을 결행하는데 누구와 상담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가 밉다는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역시 우국지사였다.

3·1운동후 조선인 출신 순사까지 민족 심리 때문에 동요를 보였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디. 조선인 출신은 당시 경찰 인력의 절반 가량이었다. 3·1운동 이전에는 순사보(補)였지만 곧 일본인과 같이 순사로 승진시켰다. 그렇지만 민족심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 출신 순사에 대해서는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지바 료·千葉了 경기도 경찰부장)

▼녹음 어떻게 했나▼

조선총독부 주요 간부의 육성 녹음은 일본의 민간 재단법인인 우방(友邦)협회의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전조선총독부 식산국장)이사장이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조선사 전공 강사 미야다 세쓰코(宮田節子)에게 요청함에 따라 이뤄졌다.

호즈미 이사장은 당시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비판이 많은데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비판에 대해서는 절대 승복할 수 없다. 여생을 당시 관련 사료를 모으는 데 바치고 싶다”며 증언 자료 수집을 요청했다는 것.

이에 따라 ‘조선 근대사료 연구회’는 58년부터 62년까지 소규모 간담회를 500회 이상 계속하면서 관련자의 증언을 녹음했다. 미야다 강사 외에 강덕상(姜德相·조선사 전공) 사가(滋賀)현립대 교수 등이 동행해 증언자에게 질문했다.

녹음자료는 그후 우방협회와 가까웠던 사단법인 중앙 일한협회로 넘겨졌다가 94년 가쿠슈인(學習院)대학으로 옮겨졌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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