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푸틴 외교스타일 비교]화끈에서 깐깐으로

  • 입력 2000년 6월 22일 19시 34분


러시아 외교가 확 달라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취임한 지 50여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보리스 옐친 정부의 보드카처럼 화끈하지만 실속 없던 외교가 냉정한 실리 위주의 ‘깐깐 외교’로 변했다.

18일 러시아를 방문한 반기문(潘基文)외교부차관은 푸틴과 이고르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끝내 못 만났다. 28일 이정빈(李廷彬)외교부장관 방러에 앞서 미리 반차관을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나 푸틴은 19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통화한 뒤 다음날 러시아를 방문 중인 김용준(金容俊)헌법재판소장을 만나는 기민한 모습을 보였다.

푸틴은 취임 뒤 3차례 해외순방길에 올랐고 연말까지 일정이 빡빡할 정도로 정상회담 등의 일정이 잡혀 있다. 96년 심장병 수술 뒤 외국방문을 거의 하지 못했던 옐친과는 대조적이다.

옐친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 많은 서방 지도자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노타이’로 만나는 절친한 관계.

그러나 97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일본총리와 사우나를 하면서 올해까지 러일평화조약을 체결키로 합의하는 등 “즉흥적으로 뒷감당 못할 약속만 남발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호주가(好酒家)인 옐친은 회담 중 술김에 여러 차례 무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푸틴은 외국 정상들과 만나 ‘칼 같은 의전’을 지키면서 ‘사무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아 “상대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푸틴은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을 고집하자 “공동으로 하자”고 허를 찌르는 등 치밀한 전략과 계산된 발언으로 서방측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경제협력과 지원을 받아내는 데는 적극적이어서 “챙길 것은 다 챙긴다”는 평을 받았다.

반면 옐친은 지난해 12월 ‘믿었던 서방’이 체첸침공을 문제삼자 “우리는 핵무기가 있다”는 엉뚱한 위협을 하면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장에는 대응하지 못하는 등 ‘허풍’ 스타일.

외교 스타일을 보면 옐친은 호탕한 ‘러시아 사내’의 모습이, 푸틴은 구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출신인 ‘정보맨’의 전력(前歷)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평가다. 그러나 러시아 일간 세보드냐는 “푸틴이 상대방과 ‘인간적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깐깐 외교’의 약점을 꼬집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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