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카프카스 한인들 체첸戰에 고통…'러시안 드림' 물거품

  • 입력 2000년 5월 29일 19시 28분


러시아 카프카스 지역의 한인들이 소련 해체 뒤 극심한 사회 혼란과 민족주의 대두, 그에 따른 전란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러시아 남부의 변방인 이 곳에 사는 한인들은 구 소련동포(고려인)와 최근에는 중국에서 돈벌이를 하러 러시아로 온 조선족에, 북한을 탈출해 이곳까지 흘러 온 탈북자들까지 크게 세 부류.

37년 스탈린에 의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온 고려인들은 소련시절부터 카프카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후가 좋고 토양이 비옥해 농사짓기에는 적합했기 때문.

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연합(CIS) 곳곳에서 내전과 민족분쟁이 일어나면서 카프카스에 고려인이 늘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 내전으로 1만여명의 고려인들이 러시아남부로 탈출했다. 또 94년과 지난해 터진 두 차례의 체첸전쟁으로 5000여명의 한인이 인근 공화국으로 몸을 피했다.

체첸 독립 선언이후인 91년부터 탄압에 시달리던 한인들은 생활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다가 전쟁이 터지자 집과 재산을 남겨둔 채 결국 맨 몸으로 탈출했다. 교사출신으로 체첸수도 그로즈니에 살던 김 이그리씨(70)는 러시아군의 폭격이 쏟아지는 속에서 4개월을 버티다가 단신으로 올 1월 탈출했다. 그러나 전쟁통에 굶어 죽다시피한 부인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모스크바와 카프카스를 오가며 한인난민들을 돕는 이형근(李衡根·60)목사는 “한인들이 유달리 집과 농토에 대한 애착이 많아 쉽게 피란을 떠나지 못하다가 변을 당한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전쟁으로 희생된 한인들의 수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 러시아군에게 국경을 넘는 대가로 줄 돈을 마련하지 못해 사지에 버려진 경우도 있다.

현지 고려인협회가 밝힌 카프카스 한인은 모두 4만여명. 이미 생활기반을 잡은 한인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소련시절과 달리 정부가 농산물을 수매해 주지 않아 추수가 끝나면 트럭을 빌려 직접 팔러 다녀야 한다. 그러다 보니 부패한 지방경찰과 폭력배에게 돈과 물건을 뺏기고 목숨까지 잃는 일도 많으며 추수한 곡식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들어야 하는 실정이라는 것. 게다가 농기계 임대 등 영농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부분의 고려인 농가들은 빚을 많이 진 상태여서 엎친 데 덮친 격. 모즈도크 근처에서 부농(富農)으로 통했던 최 콘스탄틴씨(53)는 해마다 빚만 늘자 최근 농사를 포기했다.

로스토프나도누 등 러시아 남부 대도시에는 5000여명의 조선족이 보따리장사를 한다. 큰 돈을 모아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러시안 드림’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밀입국자로 러시아경찰의 단속을 피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북한출신의 최덕수씨(55)는 극동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 탈출, 시베리아를 거쳐 91년 이곳까지 흘러 왔다. 한때 러시아 여자와 동거했으나 헤어져 목수일과 농번기에 품을 팔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간다. 물론 불법거주자로 경찰에 잡히면 북한으로 송환될 각오까지 해야 한다.

모즈도크 고려인협회 동 세발로트회장(45)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수록 이곳으로 오는 고려인들의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며 “고국에서는 지명도 낯설겠지만 카프카스지역의 동포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추진하려는 한인 극동 이주계획은 역사적으로는 옳지만 중앙아시아의 삶에 익숙해진 고려인들은 카프카스 이주를 더 선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체첸접경 모즈도크의 이소영목사 부부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카프카스 지역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재미동포 선교사 부부. 내전을 겪고 있는 러시아 체첸 접경도시 모즈도크의 이소영(李昭泳·70)목사와 부인 이순양(李蕣良·50)씨는 체첸 1차전쟁이 시작된 94년부터 이 곳에서 선교와 난민구호 의료봉사 등으로 현지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모즈도크는 4만의 인구가 인근 군부대에 의존해 살거나 전쟁을 피해온 피란민으로 이뤄진 군사도시. 이목사는 이곳을 중심으로 카프카스지역에 62개의 크고 작은 교회를 세웠다. 교인들의 수는 4000여명.

슬라브정교(러시아인)와 이슬람교(체첸인 등 다른 카프카스민족)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극심한 곳에서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미국 개신교계에서도 화제로 떠올랐을 정도.

이목사는 전쟁이 격화되자 몰려드는 난민들을 모두 교회건물에 수용했고 상당수의 난민이 후방으로 떠난 지금까지 무료급식을 계속하고 있다.

현지 고려인협회의 동 세발로트 회장은 “이목사가 특히 전쟁으로 피해를 본 한인(고려인)들을 도와 정착시키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며 고마워했다.

이목사는 미국에서 의료기기를 들여와 현지에 치과병원과 기독교대를 세우기도 했다. 현재 종합병원 설립과 임시인가를 받은 기독교대를 정규대학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중이다.

77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를 하다가 은퇴한 이목사 부부가 전화(戰火)의 한복판에 던져진 것은 그야말로 우연한 일이었다. 그는 남은 삶을 봉사하면서 조용히 보내려고 러시아에서도 오지인 카프카스 지역을 찾았다. 그러나 이 곳으로 오자마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쟁이 터져 당초의 계획과 달리 미국에서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목사 부부는 “(전쟁으로)정세는 불안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마을인 카프카스에서 바쁘게 살다보니 더욱 젊어졌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모즈도크(러시아 북오세티야공화국)=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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