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강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자리잡은 본관과 부속건물들은 모스크바에 근무하는 각국 외교관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중심가를 도는 순환도로 바로 옆이어서 교통도 편리하다. 러시아 정부청사인 벨리돔 건너편에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모스크바의 만성적인 주택과 사무실난으로 몇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아직도 대사관이 셋집(?)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보면 위풍당당한 미 대사관이 더욱 부럽다.
미국 정부가 번듯한 건물을 두고 그 옆에 2억6000만달러(약 2860억원)의 거금을 들여 무려 15년만에 새 건물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이 때문에 12일 입주식을 가진 제임스 콜린스 미대사의 감회가 특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새 대사관 건물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냉전시절부터 악명 높았던 미-러의 첩보전 때문. 구관 건물은 러시아 정보기관의 도청장비로 가득했다. 미국측이 정기행사처럼 점검에 나설 때마다 천장 마루 등 건물 곳곳에서 러시아측이 설치한 도청장비가 발견됐다. 대사관 건너편의 정교회 사원은 실상은 미 대사관을 도청하는 기지였다.
견디다 못한 미국은 아예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미국은 건설요원과 건설자재를 미국에서 공수해 도청장비가 들어갈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천문학적인 건축비와 기간이 필요했지만 보안을 위해 감수했다.
미 대사관측은 구관을 영사관으로 사용해 러시아인들은 아예 신관에 들어올 수 없게 할 예정이다. 그러나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청문제가 일단락됐다고 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기상천외한 기술을 개발해 미국의 통신을 엿들을 가능성을 영원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다른 대사관도 모두 도청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17일 새 건물을 지어 입주하는 영국 대사관도 보안부분에 가장 신경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98년 한-러 외교관스파이 사건 당시 러시아측은 한국대사관 안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알고 있었다. 주러 한국대사관도 러시아측으로부터 부지를 받아 곧 대사관의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미국의 예를 참고삼아 보안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