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尼 첫 평화적 정권교체]"와히드" 연호속 보안군 배치

  • 입력 1999년 10월 21일 00시 14분


80년대 후반부터 동아시아를 휩쓴 민주화의 물결이 인도네시아에도 밀어닥쳤다.

20일 인도네시아는 45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전 대통령 수하르토의 66년 쿠데타에 의한 실권장악 이후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86년 필리핀에서 피플파워(민중의 힘)에 의해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권좌에서 물러난 이래 민주화의 격랑은 대만과 한국 등의 정치를 차례차례 변모시켰다.

▼안정속 변화 선택▼

이번에 인도네시아의 다수 국민은 개혁적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를 지지했다.

국민협의회(MPR)가 온건한 압둘라만 구스두르 와히드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다수 국민의 여망과 다르다.

그럼에도 MPR는 결국 점진적인 개혁, 안정 속의 변화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막판에 대역전극▼

▽…이날 오후 MPR에서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자 와히드와 메가와티의 두 진영에는 희비가 교차.

개표 초반에 메가와티 표가 10표 나올 때까지 와히드는 1표밖에 얻지 못했으나 200표 개표에 이르러서는 메가와티 110표, 와히드 90표로 메가와티가 박빙의 리드. 그러나 550표를 개표하면서 와히드가 역전해 그대로 승리했다.

▽…이날 MPR 의원들은 집권 골카르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는 극도의 혼미 속에서 예정보다 30분 늦은 오전 10시반 의사당으로 입장.

메가와티와 와히드가 지명수락을 발표한 뒤 의원들은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한명씩 기명 투표. 투표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 오후 1시쯤 종료됐으며 선거관리위원회는 곧 수작업으로 개표.

▽…투표 직전 집권 골카르당과 군부 등은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메가와티 지지를 시사.

골카르당 부의장 마르주키 다루스만은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메가와티를 지지해서 안될 이유가 없다”고 말했으나 선거결과는 와히드의 승리로 나타나 골카르당의 양동작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이날 오후 2시반(현지시간)경와히드당선 소식이 전해지자MPR건물 안팎을 비롯한 수도 자카르타 시내 곳곳에서는 와히드 지지자들이 ‘대통령 와히드’를 연호하며 국가를 합창.

메가와티 지지자들은 패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참담한 표정.

▼차량폭발 1명 숨져▼

이들은 오후 4시경부터 자카르타 시내 곳곳에서 타이어를 태우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

2만여명의 시위대는 ‘죽을 때까지 혁명’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MPR 건물을 향해 몰려갔으나 보안군이 최루탄과 공포탄을 쏘며 저지.

또 오후 4시경에는 MPR 건물에서 600m 떨어진 곳에 있던 차량이 폭발해 최소 1명이 숨지고 군인 2명 등 18명이 부상했다.

▼하비비 "고국 머물것"▼

▽…B J 하비비 전 대통령은 20일 후보사퇴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에서 “외국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내 고국 인도네시아에 머물 것”이라며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비정부단체를 세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오전 하비비의 후보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하비비의 고향인 술라웨시섬에서는 2만여명의 주민이 거리로 몰려나와 반(反)메가와티 구호를 외치며 타이어를 불태웠다.

하비비의 생가가 있는 파레파레 마을 주민 1만여명은 19일 그의 당선을 위해 기도회까지 가졌으나 사퇴 소식을 듣고 낙담.

▼주가 당선발표후 급락▼

▽…이날 인도네시아 종합주가지수는 하비비 사퇴 후 7.9%나 치솟았으며 개표 직후 메가와티가 우세하자 한때 10%까지 수직상승.

그러나 와히드 당선 발표 이후 급락했다.

루피아화 가치도 19일 달러당 7560∼7610루피아에서 20일 하비비의 사퇴 후에는 6950∼7000루피아로 올랐다가 와히드 당선 후에는 7500루피아선으로 처졌다.

〈권기태기자·자카르타APAFP연합〉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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