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극복 지도자/고르바초프]대학부터 스탈린주의 비판

  • 입력 1997년 12월 11일 19시 59분


세 남자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또 다른 사람은 뒤따라 가며 이를 메우면서 앞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엇하는 거냐』고 물었다. 답변은 『나무 꽂기를 담당한 사람이 아침부터 술을 마셔대는 바람에 땅 파기와 묻기만을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공산당지배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풍자한 구 소련시절 유행했던 농담이다. 러시아남부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관료주의의 병폐를 몸으로 겪으며 자랐다. 부친이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가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집단 농장에서 노동을 해야했다. 그러나 당원 자격을 회복한 조부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국립대 법학과에 가까스로 입학을 하면서부터 그의 생각은 「뭔가 바꿔야 한다」는 쪽으로 굳어갔다.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난 자는 죄인』이라고 강의하는 교수에게 『레닌도 정적(政敵)의 망명을 허용했다』며 정면으로 반발, 교수와 학생들을 경악케 했다. 단체로 영화를 보던 중 과일과 고기로 풍성한 농민의 식탁 장면이 나오자 『인민을 속이지 말라. 농민은 굶주림에 지쳐있다』고 소리쳐 국가보안기관(KGB)에 끌려가기도 했다. 고향의 당 간부를 맡으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집단 농장의 경우 목표치를 넘는 초과생산량은 개인에게 분배했다. 지역 신문에 당을 비판토록 유도하는 등 파격성을 보여줬다. 57년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민주화시위 진압때는 『우리에게는 남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고 말해 한동안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최소한 그가 지역당 1서기로 있던 스타브로폴에서는 일찍부터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됐던 셈이다. 지방에서의 성공은 크렘린궁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78년 모스크바 진입에 성공, 85년 3월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당서기장으로 추대되면서 그는 개혁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당은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은 완전무결한 절대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다른 용기와 신념만이 환자(소련)를 고칠 수있습니다』고르바초프는 잘못된 현실을 인정하고 고치려는 용기와 남보다 앞서 시대를 읽을 줄 아는 통찰력으로 70여년의 공산당 1당 독재를 끝냈다. 〈모스크바〓반병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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