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국가 지도자死後 권력재편]

  • 입력 1997년 2월 24일 20시 23분


[윤희상 기자] 중국대륙의 최고실력자 鄧小平(등소평)이 세상을 떠난 뒤 중국의 최고지도부는 22일 『등소평동지의 유지를 계승해 중국의 개방과 개혁, 현대화운동을 계속하겠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江澤民(강택민)당총서기,李鵬(이붕)총리 등 최고지도부의 대동단결 의지표명과 후계권력 재편은 별개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체제 최고실력자의 사후 후계권력 재편과정은 거의 예외없이 혹심한 권력투쟁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12억 중국대륙의 후계권력 재편과정을 역사적 실례를 통해 점쳐본다. ▼ 레닌 사후 스탈린의 대숙청 ▼ 1924년1월 숨을 거둔 「혁명가」레닌은 유언장에 「스탈린은 너무 저속한 사람이어서 당서기장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썼다. 레닌은 죽기 2년전 스스로 스탈린을 서기장에 임명했다. 레닌 사망 후 옛 소련 공산당의 당권경쟁은 일차적으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의 「3인방」과 트로츠키가 맞선 형국으로 진행됐다. 지노비예프는 17년 프롤레타리아혁명 때까지 레닌의 제1부관으로 불렸던 인물. 카메네프는 지노비예프보다 지식인적이었고 온건했다. 두사람은 모두 유태인이었으며 20년대 당권경쟁에서 줄곧 보조를 맞췄다. 이들에게 스탈린은 당초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스탈린은 마르크스이론에 정통하지도 조직활동이나 연설능력이 탁월하지도 않았기 때문. 당시 선두주자는 뛰어난 지적능력과 선동력 그리고 치밀한 조직력 및 행정능력을 갖춘 트로츠키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먼저 25년 3인방에 의해 군사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된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당초 계획과는 달리 강력한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스탈린에 의해 제거됐다. 40년 멕시코에 있던 트로츠키는 서재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됐다. 결국 레닌의 후계는 외견상 가장 취약했던 스탈린에게 돌아갔다. ▼ 스탈린 사후의 트로이카체제 ▼ 스탈린이 급사한 뒤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의 3인 과두체제가 등장했다. 말렌코프는 20년대 후반 스탈린의 비서역 출신. 52년 제19회 당대회에서 스탈린 대신 중앙위원회 보고를 해 베리야와 함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는 스탈린이 죽은 53년에 총리가 됐다. 베리야는 스탈린시대에 대숙청을 지휘했다. 말렌코프는 스탈린 때의 외교통. 39년에는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독소전이 발발하자 국가방위위원회 부의장으로 스탈린의장을 보좌했다. 스탈린 사후 곧바로 형성된 일차적인 3인 집단지도체제는 그러나 3개월밖에 끌지 못했다. 베리야가 같은 해 6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책임자로 지목돼 전격 체포돼 총살됐기 때문. 대신 당서기의 한사람에 불과했던 흐루시초프가 제1서기가 돼 3인체제에 합류했다. 그는 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연설을 감행해 경쟁자들의 기선을 제압한 뒤 57년 자신을 축출하려던 말렌코프와 몰로토프 카가노비치등 스탈린시대부터의 주요인물들을 「반당사건」으로 묶어 제거했다. 흐루시초프는 58년에 총리직을 겸직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 티토사후 유고연방 통합리더십의 붕괴 ▼ 80년5월 35년여 동안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던 종신대통령 티토가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의 발병 직후부터 통치권을 떠맡은 연방간부회 당중앙간부회 당중앙위 등 3원(院)집단체제는 『유고슬라비아의 대심장이 멎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크로아티아의 분리주의운동 등 유고 내 민족분규는 결국 탈냉전의 대(大)조류를 타고 90년대 들어 내전으로 불붙었다. 국가통합은 물건너갔고 내전으로 20여만명이 죽고 수백만명이 살 곳을 잃었다. ▼ 毛澤東(모택동)사후 지명후계자의 단명 ▼ 76년9월 모택동이 사망하자 세계의 이목은 중국에 집중됐다. 모택동은 후계자로 華國鋒(화국봉)을 지목했다. 그러나 화국봉의 성장과정이 워낙 급속도였기 때문에 아무도 앞날을 단언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혁명동지 周恩來(주은래)가 7개월전인 76년2월 먼저 사망하자 화국봉을 총리서리에 임명했다. 두달 뒤인 4월 그를 총리로 격상시키고 당제1부주석도 겸임시켰다. 반면 당시 온건파로 분류되던 鄧小平(등소평)은 제1부총리직에서 밀려나고 일체의 공직도 빼앗겼다. 화국봉 외에 모택동 부인 江靑(강청)의 후원을 받는 王洪文(왕홍문)제2부주석 겸 당중앙정치국 상무위원, 張春橋(장춘교)군총정치부주임 부총리 당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이 실세였다. 78년부터는 화국봉을 겨냥한 「모택동 비판」이 등소평에 의해 제기됐다. 화국봉의 영향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급기야 화국봉은 81년 6월말 당주석에서 부주석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으며 당정군(黨政軍)의 실권을 장악한 등소평에 의해 실각했다. ▼ 등소평 사후 중국의 강택민체제 ▼ 강택민 중국 당총서기는 모택동이 지명한 후계자 화국봉과 성장과정은 상당히 흡사하다. 일개 부성장(副省長)이었던 화국봉이 모택동 덕분에 10년만에 권력의 정점에 섰던 것은 강총서기가 89년 천안문사태 직후 상해시장에서 일약 당총서기로 발탁된 것과 비교해 볼 만하다. 그러나 중국의 개방 개혁정책이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이를 지휘한 등소평에 대한 호평이 이어진다면 강총서기는 과거 스탈린이 권력투쟁을 극복한 것처럼 안착할 가능성도 높다. 유의할 일은 비록 강총서기가 「천안문 유혈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에선 멀다고 해도 이 문제를 「등소평의 과오」로 인정하는 날이 올 것이냐는 것이다. 이미 광주(廣州)에서는 천안문사태 재평가요구 대자보가 나붙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파들이 『(시장경제체제가)이대로 가면 사회주의의 설땅을 빼앗고 말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이같은 정황에서 「천안문사태」와 관련해 중국지도부가 받게될 압력은 중국의 후계체제의 운명을 좌우할 「뇌관」으로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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