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사망]강택민 軍장악 능력 있나

  • 입력 1997년 2월 20일 20시 01분


[북경〓특별취재반] 鄧小平(등소평)이 사라진 지금 후계자 江澤民(강택민)총서기겸 국가주석의 권력장악여부에 인민해방군의 향배가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毛澤東(모택동)의 말이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등소평의 사망은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인적(人的)결합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몰고올 전망이다. 중국군은 형식적으로는 당의 지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돼있지만 당은 일종의 매개체일 뿐이다. 양자의 유기적 결합에는 군에 뿌리를 둔 개인의 권위가 주요역할을 해왔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모두 두터운 군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근거해 군에 대한 지도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등소평 사후 제3세대 핵심으로 부상한 강택민에게는 이같은 군사적 카리스마가 결여돼 있다. 이런 강택민에게 과연 해방군이 100% 충성을 바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3백만 인민해방군의 향배야말로 강택민체제 유지의 최대관건이다. 당과 군이 분리되고 정치불안정이 증대될 때 군부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같은 점을 잘알고 있는 강택민은 그동안 지속적인 군부물갈이를 통해 군부장악을 시도해왔다. 92년 11월 군부에 대한 첫 대규모 인사를 단행한 이래 5차례에 걸쳐 장군 등 고위군간부 6백여명이 강택민계열로 채워졌다. 강은 인민해방군 최고계급인 상장의 경우 29명의 계급장을 자신의 손으로 달아주었다. 은퇴자를 포함, 46명에 달하는 중국군 상장의 과반수 이상을 물갈이한 셈이다. 지난해에는 해 공군사령관을 자파인물인 石雲生(석운생)과 劉順堯(유순요)로 교체하기도 했다. 군부지도자들의 포섭작전도 등소평의 지원아래 치밀하게 전개돼왔다. 등은 89년말 공산당 제13기 5차 중앙위원회에서 강택민을 군사위주석으로 밀어 군권을 쥐게 하면서 해군출신의 劉華淸(유화청·82)과 제3야전군 출신 張震(장진·84) 등 군원로들을 군사위부주석으로 임명했다. 강택민의 군부장악을 지원토록 한 조치였다. 95년 9월에는 등소평판공실주임 王瑞林(왕서림)과 함께 군부내 등소평친위세력인 遲浩田(지호전)국방부장과 張万年(장만년)을 역시 군사위부주석으로 임명했다. 강택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호전과 장만년은 연로한 장진과 유화청이 은퇴하면 군부의 최고실권자가 된다. 이같은 움직임은 강택민을 핵으로 한 상해방(上海幇)과 산동군벌의 손잡기로 해석되기도 했다. 지호전 장만년 왕서림은 모두 군지도자의 배출지로 이름난 산동성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군장악노력에도 불구하고 강택민의 군부지배력은 여전히 미지수다. 해방군의 대부격인 楊尙昆(양상곤)과 그의 이복동생인 楊白氷(양백빙) 등 이른바 양가장(楊家將)세력이 미약하나마 남아있고 뿌리깊은 분파주의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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