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사망/정치역정]개혁 중국 설계한 「작은 거인」

  • 입력 1997년 2월 20일 07시 36분


「사회주의의 원칙은 첫째가 생산발전이고 둘째가 공동치부다. 사회주의는 부의 축적 순위가 국가 인민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다를뿐 공동부유 추구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그의 실용주의 사상이 당의 공식 지도이념으로 채택된데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마저 그의 구도대로 마무리된 지난 92년 10월 제14차 당대회 폐막 다음날 鄧小平(등소평)은 흡족한 표정으로 당정치국원들을 격려했다. 「부도옹(不倒翁)」 「태상황제(太上皇帝)」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의 이름으로 중국의 현대를 이끈 그가 당정(黨政)공식행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毛澤東(모택동) 周恩來(주은래)에 이어 중국의 영도자로 지칭되는 등소평은 앞의 두 지도자에게 부분적으로 결여됐던 혁명가적 군사전략가적 정치가적 외교가적 능력을 두루 갖춘 5척단구의 「작은 거인」이었다. ▼ 타고난 혁명가 ▼ 파리 유학중이던 1924년 당시 20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9년 광서성(廣西省)에서 폭동을 주도했고 농공홍군(農工紅軍) 제7군과 제8군을 창설해 혁명거점을 건립함으로써 일찍이 혁명가적 기질을 보였다.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 모택동파의 유력한 간부가 된 등소평은 야전군의 지도자로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으며 1976년 모의 사망후엔 중국의 현대화 4개항(농업현대화 공업현대화 국방현대화 과학기술현대화)강령의 하나로 군의 현대화를 적극 추진, 군사전략가로서도 탁월함을 보였다. 이는 후에 당 정 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기반이 됐다. 그는 또 「3하3상」으로 불리는 세차례의 실각에서 재기했고 1989년6월 천안문사태이후인 그해 11월엔 일체의 공직에서 사임하고서도 임종의 순간까지 최고지도자로서 군림했다. 1978년12월 제11기 3중전회(中全會)에서 개혁개방정책의 기치를 내걸고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그는 1966년5월부터 1976년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화된 중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새로운 궤도에 진입시켰다. 사회주의와 개혁개방 추진에서 오는 이념상의 갈등을 경제적으로는 「1개중심점」(경제건설)과 정치적으로는 「2개기본점」(사회주의 고수, 공산당 지도 등 4개 기본원칙과 개혁 개방 견지)이라는 지도노선으로 해결해 온 것도 그의 수완이었다. 등소평은 외교면에서도 전략사상을 분명히 제시했다. 대만과의 관계를 「1국2체제」방식으로 처리한다는 원칙을 확립, 대만과 국교를 맺는 국가와는 단교로 대처해왔다. ▼ 文革때 毛와 대립 ▼ 또한 1953년 주은래가 제시한 「화평5원칙」을 고수하며 1992년 8월 한국과 수교를 하는 등 유연한 외교를 이끌어 왔다. 등소평은 중국에 새질서를 세웠지만 그에 따른 시련과 과오로 풍운의 삶을 살았다. 그는 1933년 공산당 국제파에 의해 국민당군대와의 투쟁방법을 달리 주장한 모택동파로 몰려 강서성(江西省) 당서기직에서 해직됐다. 그의 첫번째 실각이었다. 1934년 국민당 군대의 포위를 뚫고 홍군(紅軍)과의 장정을 시작한 등소평은 1935년 당중앙비서장으로 뽑히며 다시 정력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모택동의 신임을 얻으면서 중국 정부수립후인 1952년 정무원부총리(당시 총리는 주은래)로 승진했다. 그러나 1966년 문혁(文革)초기 劉少奇(유소기)와 함께 모파(毛派)인 홍위병(紅衛兵)의 행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도, 모의 분노를 사며 1967년7월 공직으로부터 파면됐다. 그리고 1968년10월에는 강서성으로 유배돼 기계공장에서 일을 하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그의 두번째 실각이었다. 등소평은 1973년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되었다. 1975년 당정치국상무위원으로 선임됐고 부총리와 군총참모장도 겸임하게 된 그는 문혁의 급진노선을 비판했다. 4인방으로 불리는 문혁파로부터 수정주의자로 반격을 받은 그는 1976년 청명절인 4월4일 주은래 추모시위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돼 또다시 실각했다. 그의 세번째 실각이었다. 1976년10월 모택동의 사망과 4인방의 체포이후 1977년3월 모든 직책을 돌려받은 등소평은 모사망이후 주석직을 수행해온 華國鋒(화국봉)과 대립했다. 등소평은 1978년12월 제11기 3중전회에서 「1개 중심점과 2개 기본점」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 天安門사태 오점 ▼ 그는 실권장악후에도 개혁속도에 대해 끊임없이 제동을 걸어온 보수파와의 갈등 속에 후계자로 내세웠던 胡耀邦(호요방)을 1987년에, 趙紫陽(조자양)을 1989년 천안문사태때 물러나게 하는 방안으로 정치적 시련을 견디어 냈고 그 와중에 과오도 범했다. 그는 1980년 이탈리아 기자 올리아나 팔라치에게 『여러 차례의 치명타를 극복한 것은 실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란 바다의 큰 파도와 같은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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