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세계를 움직인 사람들/江澤民]

  • 입력 1996년 12월 30일 20시 20분


「北京〓黃義鳳특파원」 지난3월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촉발된 일련의 위기사태는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중국」원칙을 관철시키겠다는 중국의 결의를 전세계에 과시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경고가 잇따르고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중국군은 예정된 세차례의 훈련을 강행했다. 당시 사태를 주도한 江澤民(강택민)국가주석은 해군함정에 올라 직접 작전을 독려하고 李登輝(이등휘)대만총통을 거명해서 비난하는 등 초강경의 자세를 보였다. 대만해협 위기가 지난뒤 강주석은 이집트 등 아프리카 6개국방문(5월)에 이어 6월하순 스페인 노르웨이 등 유럽 6개국 방문길에 올랐다. 강주석의 유럽순방은 미국이 무역제재 등 중국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한다면 미국 대신 유럽을 경협파트너로 삼을 수 있음을 암시한 대미(對美) 경고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대미 강경자세를 한껏 과시한 강주석은 그러나 11월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서 클린턴미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양국 정상이 해마다 상호방문키로 합의함으로써 국제정치무대에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96년 국제정세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미중(美中)간 갈등과 화해의 한편엔 항상 강주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강주석은 국내정치에서도 자신의 위상을 굳히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주석은 연초부터 강정치(講政治·정치를 말하라)와 정신문명건설을 강조, 인민에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취해왔다. 이는 毛澤東(모택동)이나 鄧小平(등소평)과 구분되는 강택민시대의 개막을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정신문명건설은 10월초에 열린 6중전회에서 당의 공식결의로 채택됐다. 또 측근인 賈慶林(가경림)복건성 당서기를 북경시장으로 끌어올린데 이어 해 공군사령관을 자파인물로 교체, 권력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권력굳히기의 관건이 될 내년 가을의 15차 당대표대회를 앞두고 강주석이 해결해야 할 내부문제가 산적한 것도 사실이다. 부실국유기업의 정리문제를 비롯해 도시실업자문제 빈부격차 동서간지역격차 부패문제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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