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연변 떠도는 탈북자들]

  • 입력 1996년 12월 27일 21시 29분


「延吉〓李炳奇·孔鍾植기자」 올 초 친척방문으로 북한 회령에 다녀온 연변조선족 김모씨(52·여)는 연길병원에서 한달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회령에서 탈북자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하고는 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김씨가 목격한 것은 탈북했다가 중국 왕청에서 붙잡혀 송환된 50대 부부의 공개처형 장면. 남자는 소처럼 코 안쪽이 철사로 꿰어져 있었고 여자는 손바닥이 철사로 뚫린 채 묶여있어 피가 줄줄 흘렀다. 북한 당국은 이들을 여러사람 앞에서 「반역죄를 저지른 죄인」이라고 공포한 다음 총살시켰다. 「탈북했다가 잡히면 코를 꿴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가 직접 현장을 목격한 김씨는 그 후 밤만 되면 깜짝 놀라서 깨는 등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증가하면서 「잡혀가는 탈북자」 또한 늘고 있다. 본보가 최근 입수한 중국공식문서에 따르면 지난 94년과 95년 두해 동안에만 중국 땅에서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된 탈북자는 모두 1백40명. 이들은 잡히면 약 보름동안 수용소에 수용돼 중국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조사과정에서 탈북자란 사실이 확인되고 중국내 체류기간 동안 특별한 범법행위를 하지 않았을 경우 북한측 체포조나 사회안전원에게 인계된다. 이 때 북한측은 철사로 사람몸을 꿰뚫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등 갖가지 잔학행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해부터 조선족교포와 중국공안측이 북한측의 공공연한 잔학행위에 대해 잇따라 항의하면서부터 북한체포조는 적어도 북한국경을 넘기전까지는 이같은 잔학행위를 「자제」하고 있는 편. 또 최근 탈북자들이 급증하면서 과거처럼 일률적으로 총살형에 처하기가 어려워지자 「단순탈출」에 대해서는 처벌강도를 완화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탈북자도 중국에서 한국인을 만났을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한달간 연길에 머물며 식량을 구해 이달 초 다시 북으로 돌아가다 국경에서 적발된 한 20대 여성은 신문과정에서 『연길에서 한국인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최근 무산시를 다녀온 조선족교포 서모씨(53)는 『무산시내에는 이 여성이 곧 공개화형을 당한다는 소문이 퍼져있다』고 말한다. 탈북자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무엇보다 중국전역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5천5백여명의 조교(중국 조선족입장에서 북조선 교포를 부르는 약어)조직. 북한 영사관이 있는 중국 심양 총본부를 중심으로 「세포망」이 잘 갖춰져 있는 이들은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다른 조선족과는 달리 북한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중국판 조총련」이다. 이들은 또 중국어에도 능통해 겉으로 봐서는 일반 조선족교포와 전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북한의 정보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연변자치주 화룡시에서 붙잡혀 지난 10월27일 북한에 강제송환된 5형제도 바로 조교들의 정보망에 걸려 발각된 경우. 지난 9월 청진을 탈출, 친척집에 한달간 숨어살며 한국으로 망명할 준비를 해오던 이들 5형제는 친척집의 부인이 이들에 대해 한마디 한 것이 우연히 화룡시내에 살고 있는 조교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붙잡혔다. 북한측의 요청에 따라 중국 공안은 이들을 체포, 북한측에 신병을 인계해야 했다. 북한은 이들을 데리고 중국측 세관을 통과하자마자 몽둥이로 마구 때려 다리를 부러뜨린 뒤 트럭에 실어 데려갔다. 일부 중국에 동화된 조교들을 제외하고는 조교들이 이처럼 북한정권에 충성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한출신이어서 친북성향인 데다가 북한과의 무역에서 우선권을 얻고 있는 등 북한으로부터 유형무형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 조교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탈북자들을 가능하면 보호하려고 애쓴다. 특히 탈북자들에게 일차적인 도움을 주는 국경지역의 조선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탈북자들이 넘어오면 밥을 해주고 식량까지 싸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국경지역인 혼춘시 경신에서 만난 한 조선족은 『두만강이 얼어붙은 뒤 항상 밤에는 밥할 준비를 해놓는다』면서 『며칠 전에도 탈북한 40대 남자가 밤에 문을 두드려 밥을 한솥 해준 뒤 쌀을 좀 챙겨줬다』고 말했다. 탈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연변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연변쪽에 있는 친척들은 북한에서 탈북자들이 넘어오면 농가의 빈집을 구해주고 일자리를 적극 알선해준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한 친척들은 돈을 주고 임시호구증(신분증)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현재 중국에서 임시호구증을 위조하는데 드는 돈은 인민폐로 5백원(5만원). 정식호구증도 5천원(50만원)정도만 주면 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연변조선족들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북한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빼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연변조선족을 동원하는데 소재지 확인에서 탈출까지 인민폐로 1만5천원(1백50만원)정도가 든다. 성공할 경우 대개 사례비를 따로 준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고 무작정 국경을 넘어오는 무연고탈북자들은 체포되기가 쉽다. 지난해 10월 탈북한 평양출신의 한 청년은 연고가 없어 연길시내를 한달간 헤매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북한이 직영하는 식당 「금강원」을 찾아가 식사를 구걸하다가 붙잡혀 강제송환됐다. 친척이라고 항상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월 북한을 탈출한 20대 청년이 중국 장춘에 살고 있는 매부를 찾아왔는데 겁이 덜컥 난 매부가 중국공안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공안이 이 청년이 하도 불쌍해 북한측 몰래 북한에 되돌려 보내면서 『다음에는 매부집에 오지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 청년은 매부집에 또 들렀다. 결국 중국 공안은 이 청년을 체포, 북한측에 인계했는데 북한의 체포조가 그 자리에서 철사로 엮어 데려갔다. 이밖에 탈북자들은 한국기업인들이나 현지에 나와 있는 종교단체에 은밀히 연락,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여러가지 문제가 걸리기 때문에 이들에게 돈을 좀 줘서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현재 탈북자 한명을 데리고 있는 한 연변조선족교포는 『한국정부도 북한의 고위인사 등 이용가치가 있는 탈북자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배고파서 도망쳐 나온 일반 탈북자들은 도움받을 길이 전혀 없다』면서 『무한정 데리고 있을 수가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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