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권재현의<트랜스크리틱>‘요덕스토리’ 월드 버전이 날개 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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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4일 1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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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이 아닌 '폼페이 최후의 날'로 다시 태어나야할 '요덕스토리'

지난달 뮤지컬 '요덕스토리'(정성산 작·연출)가 세계 순회공연을 위해 새롭게 단장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혹한 인권유린 상황을 고발한 휴머니즘적 메시지에 비해 그것을 형상화한 방식이 투박하다는 평가를 불식시키려고 공 들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우선 대사를 대폭 줄이고 노래에서 노래로 연결되는 송쓰루 형식을 택했습니다. 앙상블을 포함해 45명에 이르던 등장인물을 35명으로 줄이면서 드라마를 압축한 반면 25곡이던 노래는 두 곡을 빼고 새로 10곡을 추가해 33곡(차경진 작곡 송시현 편곡)으로 늘렸습니다.


▶사실성에서 예술성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요덕스토리'

드라마는 북한 최고무용수에서 정치범으로 전락해 요덕수용소에 수감된 강련화(신효선/이진희)와 수용소소장 리명수(최형수)의 비극적 사랑에 좀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대신 납북된 일본인여성과 국군포로, 어린 꽃제비 같은 주변 등장인물의 사연을 들어냈습니다.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엔딩 장면입니다. 초연에선 련화가 수용소를 탈출하다 철조망 위에서 숨을 거두고 절망한 명수는 자폭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월드 투어 버전에선 명수는 보위대원들에 맞서 봉기한 수인들을 돕기 위해 북한군 탱크에 수류탄을 던지고 자폭하지만 련화는 살아남습니다. 명수의 영웅적 희생으로 련화에게 새 삶의 기회가 열리는 셈입니다.

사실적 묘사에 치중해 다소 투박하던 가무(歌舞) 라인은 많이 세련돼 졌습니다. 추가된 10곡 중에서 개폐막곡으로 쓰인 '2010년 어느 날'은 북한사회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서정적으로 담아냈고, '공화국 스타, 강련화'는 자본주의를 거부한다면서 오히려 황금과 달러의 노예가 된 북한의 반어적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련화와 명수의 사랑테마곡인 '나의 꿈'과 '용서'는 작품 전체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반면 '미친자들의 노래'나 '하늘이시여'는 자칫 사랑이야기에 가려질 수 있는 요덕수용소의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안병구씨가 안무한 춤도 다양해졌습니다. 기존의 부채춤과 플라멩코 외에 힘찬 브레이크댄스와 '노트르담 드 파리'의 '발다무르 카페' 장면을 연상시키는 관능적 군무까지 펼쳐집니다.

무대세트의 변화도 눈에 띱니다. 수용소공간의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던 오밀조밀한 변형무대를 대신해 9m 높이의 이동식 대형 단일세트로 대체해 위압감을 강화했습니다. 실제 철조망을 대신해 대형세트를 휘감는 담쟁이덩굴처럼 형상화한 미적 감각도 돋보입니다. 조선노동당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북한의 억압적 현실을 상징하기 위해 황금빛 낫과 망치, 붓으로 이뤄진 노동당깃발의 대형로고를 내건 장면은 공산화한 베트남을 상징하기 위해 호치민의 대형초상 걸개그림을 내건 '미스 사이공'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장 인상적 장면은 마지막에 수용소 정문을 무너뜨리면서 실물 크기의 탱크가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실제 헬기를 등장시킨 '미스 사이공' 오리지널 버전과 비견할만합니다.

▶극 전개에서 아쉬운 2%-사랑의 발효과정

'요덕스토리'는 "전체 내용의 3분의 2가량을 바꿨다"는 연출가 정성산 씨의 말처럼 재창작에 가까운 일대 변신을 꾀했습니다. "기존 작품이 사실성을 강조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면 월드버전은 예술성을 강화한 극영화처럼 다가가도록 공을 들였다"는 말도 수긍할만합니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예전만큼 뜨겁지 않았습니다. "드라마가 너무 약하다"는 평가가 주종을 이룹니다. 비참한 북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전작이 신파조이긴 해도 좋았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숨어있을까요. 바로 극적 재미를 위해 부각한 련화와 명수의 사랑이야기가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극중 련화는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명수에게 몸을 바칩니다. 그때까지 명수는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고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소녀를 즉결처분하는 살인마였습니다. 공화국 최고 스타가 생존을 위해 그런 살인마에게 몸을 팔아야하는 처지로 전락했건만 련화는 별 거부감 없이 명수를 사랑합니다. 게다가 그 저주받은 사랑으로 인해 뱃속에 생긴 아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물론 처음에 증오로 시작했다가 사랑으로 변하는 관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극예술로 이를 펼쳐낼 경우에 그런 미묘한 감정의 발효 과정을 얼마만큼 설득력 있게 묘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요덕스토리'의 러브스토리엔 그 과정에 대한 윤리적, 심리적 갈등과 극복의 드라마가 빠져있습니다. 게다가 련화와 명수뿐 아니라 주요등장인물이 모두 북한이 자랑하는 최고 엘리트라는 점도 관객에게 거부감을 가져다줍니다. 북한체제의 최대수혜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할 뿐 자신들이 맹종한 그 체제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북한민중에 대한 죄의식 내지 회개의 과정 없이 끼리끼리 사랑 놀음에 빠지는 것에 대한 반감입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유린을 고발한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포스터. 세계 순회공연을 위해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등 원작이 수정됐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유린을 고발한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포스터. 세계 순회공연을 위해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등 원작이 수정됐다.

▶'미스 사이공'이 아닌 '폼페이 최후의 날'로

그러나 작품을 꼼꼼히 뜯어보면 이런 약점을 극복할만한 예술적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희생을 통한 기독교적 구원입니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20세기 초 북한 땅에 상륙한 두 가지 사상의 충돌로 북한이 심각한 홍역을 앓게 됐다고 설파합니다. 바로 기독교사상과 마르크시즘입니다. 북한은 기독교를 거부하고 마르크시즘을 택하면서 스스로 지상천국이 아닌 지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덕스토리'는 깊은 절망에 빠진 북한사회를 치유할 처방전으로 기독교적 구원을 제시합니다.

기독교에 귀의해 탈북 했다가 북한주민을 구제할 기독교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 쓰고 다시 북한행을 택한 리태식(지혜근)은 요덕수용소의 상황에 절망해 하나님에게 "이실직고 하시라요"라며 절규하듯 노래합니다. "아버지, 내 아버지 내 말 좀 들어줘요/아버지, 내 아버지. 속히 임하소서/아버지, 아버지. 내 말 좀 들어줘. 심판해 주소서/아버지, 아버지, 제발." 그는 비록 북한에 임하지 않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절망하면서도 련화가 임신한 명수의 아이에게 '요덕'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거기엔 예수가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사랑과 용서의 상징물로 바꿨듯이 요덕이가 살아나서 죽음과 절망의 땅인 요덕을 생명과 희망의 땅으로 바꿔달라는 애절한 기원이 담겨있습니다.

기독교적 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두 가지의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회개와 희생입니다. 련화와 명수의 사랑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이 두 가지가 녹아들어야 합니다. 북한체제를 유지하고 옹위한 것에 대한 회개 그리고 그 체제에 무참히 짓밟힌 북한민중에 대한 희생. 월드버전에서 명수의 영웅적 행위는 고결한 자기희생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랑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끌어내는 회개의 과정이 빠져있습니다. 태식이 극 종반부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마시고/공화국 이곳 요덕에도 와주소서/아버지, 제발, 이 땅에 오소서"라는 노래를 부를 때 련화와 명수의 이중창이 더해지는 장면은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요덕스토리'는 '미스 사이공'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인류보편의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이 작품이 참조해야할 것은 고대 로마 명문귀족 글라우쿠스와 로마 식민지 귀족출신에서 노예로 전락한 이오네의 사랑을 그린 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입니다. 야심과 명예욕에 불타던 글라우쿠스가 이오네에 대한 깊은 사랑(에로스)을 거쳐 기독교의 사랑(아가페)에 눈을 떠 폼페이 최후의 날 자신과 기독교도들을 함께 구원했던 것처럼 명수와 련화의 사랑 또한 기독교적 희생과 구원의 드라마로 재탄생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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