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구가인] 루저스피릿③ ‘딴따라’ 예술가 강영민의 ‘루저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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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8일 1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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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자라 조는 하트.
잘자라 조는 하트.
'조는 하트'로 유명한 강영민(38)은 TV나 인터넷 매체보다는 화랑이나 미술전문지에 더 많이 등장하는, 그래서 '대중문화전문' 카테고리로 다루기엔 조금 어색한 예술인이다.

그러나 그는 일상과 예술을 분리하지 않는 '젠체하지 않는' 팝아티스트며, 자신의 작업을 캔버스 뿐 아니라 전시기획과 애니메이션, 아트디렉팅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시킨 꽤 대중친화적인 예술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루저 스피릿'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전파한 인물이란 점에서 동명의 인터뷰 시리즈에 언젠가는 한번 등장했어야 할 '문제적 작가'다. 다만 그를 이처럼 '다소 이른 시점'에 소개하는 것은, '루저 스피릿'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인터뷰할만한 사람을 섭외하기가 꽤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터뷰 섭외를 위해 접촉한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제가 루저인건 맞지만, 그런 인터뷰까지 하면서 떠벌일 필요가 있을까요?"

▶ 강영민, 루저에 대한 개념을 세우다

또, 다른 이들은 이렇게 물었다.

"제목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사실 무척 성공하고 싶은데요…."

강영민을 만나야 했다. 그는 기자에게 "루저와 루저 스피릿은 엄밀히 다른 것"이며 "인터뷰를 통해 확실히 개념 탑재를 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홍대의 곱창집으로 갔다. 다섯 테이블에 스무 명 남짓한 손님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곱창집에는 용케도 한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가게의 10년 단골이라는 강영민이 미리 전화예약을 했기 때문이다(그는 떡볶이 집을 갈 때도 예약을 한다고 했다).

알곱창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강영민은 인터뷰 내내 반말 같은 존댓말, 존댓말 같은 반말을 어색하지 않게 넘나들며 두 시간 가까이 루저론과 루저스피릿을 설파(?)했다.

- 루저 스피릿이라는 말, 직접 지은 건가요?

"그럼, 다른 데서 들어봤어요? 뭔가 괜찮죠?!"

- 저는 느낌이 좋아서 인터뷰 제목으로도 붙였잖아요. 근데, 그 뜻이 좀 모호해요.

"루저 정신이지. 의식 있는 루저. 소위 아웃사이더의 미학 그러잖아요. 같은 얘기야. 요즘 시대에 맞는 신상 어휘로 바꾼거지."

- '미수다 사건' 때문에 루저라는 말이 유행하게 됐어요.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우리 사회 루저의 척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준 거니까. 근데 사실, 루저 얘길 하려면 실존적인 얘기부터 해야 해. 자,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루저야. 기성사회 시스템에 진입하려 하면 누구나 다 루저가 될 수밖에 없어. 예컨대 기성의 기준을 들이대면, 대학입시에서 떨어지면 루저고, SKY 못가면 루저, 그 중에서 서울대 못가면 루저고, 거기에서도 또 좋은 과 가야하고, 좋은 과에서도 또 수석이 있잖아?

또, 원초적으로… 실연 안당해본 사람 있어? 짝사랑 안 해본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 루저일 수밖에 없어요. 인정을 안 해서 그렇지. 직업이 없는 백수들에만 한정시켜서 루저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지."

▶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선 모두가 루저가 된다, 그러나…"

- 그럼, 의식 있는 루저라는 '루저 스피릿'과 그냥 루저의 차이는 뭐예요?

"그냥 루저는 자기부정을 해. 여기서 벗어날 거라면서… 그런데 루저 스피릿은 자기 긍정을 하지."

- 뜬구름 잡는 것 같은데, 좀 구체적으로?

"우선 내가 이 사회의 루저란 것을 냉정하게 인정해야죠. 그러면 나는 왜 루저인가라는 물음이 생겨요. 그리고, 답은 기성사회의 룰, 일종의 스펙을 못 맞췄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엔 7전8기 기성사회에 편입하게 되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일부는 남겨져서 더 고민을 해. 난 왜 이렇게 될까, 이러면서 오기 같은 것도 생기고…. 나아가서 자기 철학이 생기는 거야. 사실 기성의 잣대에 맞추려면 자기 철학은 없을수록 좋아. 틀을 따라야 하니까. 하지만 루저로서 의식을 가진 사람은, 결국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살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런 루저 스피릿이 새로운 철학을 만들고, 예술이 되지."

- 스스로 루저 스피릿이 충만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 루저 스피릿을 가질 수 있어서 굉장히 기뻐. 내 철학을 가질 기회가 됐으니까."

그는 "라이센스를 취득 못한 것"을 자신의 대표적인 실패로 꼽았다. 재수를 해서 대학(홍익대 회화과)에 들어갔지만 졸업을 못했고, 이후 유학에도 실패한다.

대신, 강영민은 1990년대부터 동료 젊은 예술가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지금의 홍대 문화가 일궈진 시기도 당시 강영민과 또래의 예술가들이 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중순부터다. 72년생인 강영민은 자신의 세대를 개인과 일상을 발견한 세대라고 정의한다.

"우린 하루키 세대야. 대학 때 상실의 시대가 그 때 나왔어요. 민주화 후 공허함이 밀려올 때 하루키가 왕림하셨어. 하루키 소설은 드라마틱하기 보단 순간이 반짝거리잖아. 다들, 그래서 좋아 하는 거야."


▶ "루저란 자기 부정, 루저 스피릿은 자기 긍정"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는 성향은 그의 작품 속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지난 2008년 개인전 '사랑하면 진다'에서 그의 그림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감성적인 면, 약한 면을 이야기했다. 앤디워홀의 그것처럼 매스미디어를 이용하거나 감정이 배제되기 보단, 상투적인 하트를 소재로 내면의 깊숙한 감정을 보여준다.

"인간의 약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제 작업의 테마에요. 약한 마음은 굉장히 인간적인 특성 중에 하난데… 근대화가 되고 그런 약한 마음이 거추장스럽게 돼 버렸잖아요? 약한 마음을 가지면 진다, 탈락한다고. 루저 스피릿은 그런 약한 마음을 지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약한 마음을 긍정하는 태도랄까."

한편, 강영민은 낸시 랭과 함께 1세대 팝아티스트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두 사람은 2000년 대 중반부터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여왔다.

- 한국에서도 팝아트가 대중적으로 인기있죠.


"낸시 랭 때문에 많이 알게 됐지."

- 안 그래도 물어보려 했는데, 일부에서는 '낸시 랭을 키운 사람' '낸시 랭의 성공에 일조한 사람' 식으로 말하던데요? (낸시 랭 역시 기자와의 통화에서 강영민에 대해 "여러 작업에서 많이 가르쳐준 선배"라고 한 바 있다.)

"키웠다기보다.. 같이 일을 많이 했어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좋은 동료 아티스트야."

- 그 정도?

"그 정도면 엄청난 거지(웃음). 한국 미술계는 낸시 랭을 싫어해. 왜냐면, (낸시 랭은) 개념이 없기 때문에."

- 미술계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 중에도 싫어하는 사람 많던데….

"개념 있는 대중들이 싫어해요.(웃음)"

- 낸시 랭이 아티스트라면, 장사하는 제품이 좀 아티스틱 해야 하지 않나요? 홈쇼핑에서 파는 속옷은 그저 비X안과 똑같던데?

"제품 하나만 보면 비X안을 팔아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왕 속옷도 아티스트가 파는 걸 원해. 간단해, 똑 같은 커피라도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다르잖아. 낸시는 그걸 빨리 캐치한 거 같은데. 사실 낸시 랭이 미스터리 한 면이 많긴 한데, 그런 게 바로… 개념 없음에서 온 거야. 무개념! 개념 있는 사람들에 그건 완전 신대륙이거든. Terra incognita(미지의 땅)!"

- 무개념이 예술? 예술가는 개념을 세우는 사람 아닌가요?

"낸시는 무개념을 개념화 시키면서 살고 있어요. 그 계산을 내가 많이 도와줬다는 거지. 그러니까, 한국 문화계의 개념 있는 지식인들이 무개념 영역에 관심이 있다면 낸시 랭이라는 아이콘은 최고 접점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낸시랭과 소통, "그녀가 개념 있는 이들에게 욕먹는 이유는…"

- 도왔다는 건,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가요?

"아니, 대화를 하는 거죠. 디렉터가 아무리 연출을 잘해도 연기를 잘못하면 꽝이야. 심지어 배우에 따라 감독의 역할도 바뀌잖아요. 나는 그저 실험적으로 무개념에 관심 있는 거지. 예컨대, 이런 얘길 하죠. 내게 캐릭터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조는 하트'고 하나는 '낸시 랭'이죠."

- 낸시 랭의 행동 일부를 본인의 작품이라고 생각 하는 거?


"그럼요."

- 낸시 랭도 동의할까요?

"글쎄,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데…(웃음). 내가 참 부러운 게, 낸시는 현상을 만들 수 있는 파워가 있는 아티스트라는 거에요. 누가 얘기해도 관심을 안 보이다가, 낸시 랭이 얘기하면 관심을 보여. 왜? 욕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낸시가 백수 얘길 하니까 반응이 폭발적이잖아(편집자 : 낸시 랭은 '악플러들은 백수'라는 이야기를 해서 백수연대의 항의와 함께 일부 누리꾼들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강영민과 낸시 랭이 프로젝트를 함께 한 것은 2004년 '싱싱' 퍼포먼스부터다. 예술의 전당 1층 로비에 노래방 기기를 설치한 뒤 핑크색 비키니를 입고 '보랏빛 향기'를 불렀던 낸시 랭은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강영민은 올해도 낸시 랭과 세 가지 프로젝트를 함께 할 예정이다. 런던에서 'United Kingdom of 낸시 랭'이라는 프로젝트를 계획하는 한편, 또 강영민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음반도 낼 예정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올 상반기에는 예술가로서 연예인을 부각시키는 '셀러브리티 아트'라는 전시를 열 예정이다.

"난 대표적인 우리 문화 가운데 하나가 연예인 문화라고 봐. 일본의 오타쿠 문화처럼 한국에 문화가 있다면 그건 연예인 문화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국내 포털을 장식하는 건 80% 이상이 연예인 얘기잖아요."

- 그러면 낸시 랭도 그런 걸 의식하고 전시를 하는 건가요?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중요하진 않다고 봐요. 다만 낸시는 연예인을 패러디 하는 예술가 정도로 봐도 될 거 같아요."

- 낸시 랭 외에 요즘 주목하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흐흐, 이명박 대통령?"

- 대통령은 아티스트가 아니잖아요?

"요즘 서구 지식인들의 테마 가운데 하나가 정치가 어떻게 미학이 되고, 미학이 어떻게 정치가 될 수 있는가에요."

Love is terror.
Love is terror.

▶ "루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


- 하긴, 모든 분야에서 미학이 중요해지고 있더군요.


"맞아요, 아이폰이 왜 뜨겠어? 다 미학이랑 관련이 있어요. 사실 한국이 시스템 효율적으로 돌리는 거는 지금 너무 잘하잖아? 아이돌만 봐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리는지, 소녀시대는 공백이 없어(웃음). 시스템은 과학의 부분인데, 이미 효율의 생기는 게 아니라, 주체적인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야지. 아, 또 루저 스피릿과 연결되잖아."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루저 스피릿으로 돌아왔다. "루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그에게 '의식 있는, 그리고 행복한' 루저가 되기 위한 실용적인 행동 강령을 물었다. 그는 루저 스피릿을 가진 예술가가 될 것을 제안했다. 그에게 예술가란 창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예컨대, 무기력하다면… 그 무기력에 대해 이야기하면 됩니다. 블로그든, 사진이든. 어떻게든 표현한다는 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돈도 좀 벌어서 품위 있는 루저가 돼야죠. 그렇게 살다보면 사실 나는 보통 루저와는 좀 다르다는걸 깨달게 되요. 누구와 비교해 못한 게 아니라, 기준이 다른 것뿐이죠."

- 올해가 30대의 마지막인데, 마흔이 되면 스피릿이 꺾이진 않을까요?

"스피릿은 비 물질 적인 거라 나이들 수록 더 세지죠. 살기위해(웃음)."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낸시랭 캘린더 걸 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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