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기는 멈추고…객석은 텅 비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세계적 예술감독 33人의 영화에 관한 단상 ‘그들 각자의 영화관’

“이런 영화…한국에서 개봉할 수 있겠어?”

8일 오후 8시 45분 서울 중구 삼일로 중앙시네마 옆 분식집. 시사를 앞두고 라면을 먹고 있던 기자 옆 남녀의 대화였다.

세계 유명 감독 33명이 3분씩 만든 32개의 단편을 이어 붙인 ‘그들 각자의 영화관’. 2007년 5월 프랑스 칸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해 현지 상영됐던 필름이다. 칸에서 황금종려상, 감독상 등을 받았던 이들과 베니스, 베를린 등 다른 국제영화제에서 명성을 높인 감독들이 참여했다. 칸 상영본에 들어간 코언 형제와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단편은 “상업적으로 상영하지 말라”는 요구로 이번 상영본에서 빠졌다.

스타 배우나 클라이맥스는 당연히 없다. 흥행보다 메시지 있는 영화를 추구하는 감독이 많다 보니 경쾌한 느낌은 부족하다. 그런데 이 영화, 15일 개봉한다. 아래 ① ②와 같은 관객이라면 반가워할 일이다.

① 영화가 밥보다 좋거나, 한때 그랬던 관객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영화관에 대한 감독들 각자의 단상(斷想). 이탈리아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1988년 만든 영화에 대한 연서(戀書) ‘시네마 천국’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적잖다. 가장 많은 것은 극장에 얽힌 추억담이다. 특히 아시아 감독들의 이야기가 두드러진다.

대만의 허우샤오셴은 ‘쉘부르의 우산’이 걸린 1960년대 극장 앞 풍경을 흑백으로 그렸다. 2005년 ‘쓰리 타임즈’에 주연으로 기용했던 수치와 장첸이 얼굴을 내민다. 무너져 내릴 듯 낡은 극장의 커튼을 조용히 걷어 올리는 감독의 시선. ‘시네마 천국’에서 영화감독이 돼 귀향했던 토토의 그것과 닮았다.

장이머우의 ‘영화 보는 날’은 대낮부터 야외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야간상영을 기다리는 시골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정겨운 스케치는 ‘연인’이나 ‘황후화’ 등 엉성한 대작에 몰두하기 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나 ‘집으로 가는 길’ 같은 소품에서 묵직한 감동을 자아냈던 장이머우를 새삼 그립게 만든다.

기타노 다케시는 작은 시골 극장에 대한 기억에 1996년작 ‘키즈 리턴’을 끼워 넣었다. ‘키즈 리턴’을 먼저 보길 권한다. 뭉클한 마지막 대사를 빌린 농담이 유쾌하다.

삐딱하게 일그러진 특유의 냉소를 오랜만에 얼굴에서 털어낸 느낌. 감독이기 전에 영화를 마냥 동경하는 어린 관객이었다는, 거장들의 일관된 고백이다.

② 레드카펫을 꿈꾸는 영화감독 지망생들

3분의 단편에 자신의 색깔을 충분히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타일리스트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각 단편의 엔딩 크레디트가 뜨기 전, 독특한 표현방식을 짚으면서 감독이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안한 리듬을 타며 취한 듯 흔들리는 거스 밴 샌트의 카메라, 음울한 로맨스를 질척하게 그려내는 왕자웨이, 삶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왜곡된 영상에 담아내는 데이비드 린치. 모두 여전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직업인으로서의 고민이나 미디어 과잉 사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도 있다.

‘아들의 방’으로 2001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탈리아 감독 난니 모레티는 할리우드 영화 ‘록키 발보아’와 ‘매트릭스’에 열광하는 어린 아들과의 대화를 경쾌한 입담으로 중계한다. 비주류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의 고민을 덧입혔다.

캐나다 감독 아톰 에고얀의 ‘동시상영 세 편’에는 다른 극장에 앉아서 휴대전화 영상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세 편의 영화를 동시에 소비하는 관객들이 등장한다. 정보과잉의 네트워크에 사로잡혀 고전(古典)에 진득하게 몰입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인에 대한 풍자다.

○ 데이트족은 피하세요

영화광이라면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본 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1950), 장뤼크 고다르의 ‘경멸’(1963), 존 맥티어넌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1993), 홍상수의 ‘극장전’(2005) 등 영화 또는 극장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들을 더 찾아볼 만하다.

하지만 포스터에 적혀 있는 ‘절대 다시 없을 금세기 최고의 역작!’이라는 홍보 문구는 지나치다. 시사 도중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관객이 적잖았다. ‘시네마 천국’ 라스트신 키스 필름이 2시간 동안 이어지는 느낌. 주말 데이트나 심심풀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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