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명은 싫다… ‘빛의 전율’ 기대하세요

  • 입력 2007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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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대전 엑스포공원 내 대전영화촬영스튜디오에 마련된 영화 ‘해부학 교실’ 촬영장. 해부학 실습에 참여한 의대생들이 환청과 환영에 시달린다는 내용의 이 영화를 위해 황량한 느낌이 들 정도로 넓어 보이는 130여 평의 해부학 실습실 세트가 들어서 있다. 스테인리스 재질로 보기만 해도 싸늘해지는 실습대가 20여 개 줄지어 있는 풍경이 사뭇 위압적이다. 뒤편에 있는 시체 보관함 때문에 일부러 앞만 보고 있는데도 뒷목이 뻣뻣해진다.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에는 빨간 파이프가 줄줄이 지나고 있다. 마치 혈관 같다. 건물 자체가 해부된 듯. 진한 녹색의 바닥은 끈적끈적한 늪 같다. 차갑고 음산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최재훈 미술감독은 “의도적으로 채도를 확 낮춘 무채색을 많이 썼다”고 했다.》

이윽고 한 구 제작에 4000만 원이 넘게 들었다는 소품 커대버(의대 해부용 시체)가 비닐에 싸여 들어오고 촬영이 시작됐다. 손태웅 감독이 ‘액션!’을 외치자 배우 오태경이 커대버 안쪽을 손으로 헤집는다. 한지민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한다. “누가… 왜 그랬을까.”

대여섯 번 재촬영 끝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잘 만들었다고 소문난 커대버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윽.’ 너무 정교한 커대버 때문에 기자가 낮은 비명을 지르자 앉아 있던 한지민은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웃는다. 얼굴의 땀구멍에 입술의 주름, 발바닥에 보이는 미세한 혈관까지 표현된 커대버는 실리콘이 주 재료. 100% 수작업으로 한 구를 만드는 데 2개월 정도 걸린다. 해부 과정을 촬영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뼈는 물론 각종 장기도 따로 제작됐다. 실제 커대버는 포르말린 처리 때문에 피부가 갈색에 가깝지만 영화적 재미를 위해 실제 사람과 커대버의 중간 정도로 만들었다. 손 감독은 “피와 비명으로 놀라게 하는, 공포를 위한 공포는 싫다”고 말했다. 그래서 세트나 소품 등 미술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

비슷비슷한 귀신과 신경질적인 효과음으로 일관했던 최근의 공포영화들이 대부분 흥행에 참패하면서 올해는 미술과 조명 등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는 공포영화들이 많다.

6월 개봉하는 ‘검은 집’은 경찰이 자살이라고 판단한 사망사건을 조사하는 보험 사정인(황정민)이 현장에서 목격한 살인자, 이른바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와 대결하는 공포 스릴러. 목격 장소인 ‘검은 집’ 세트는 경기 광명시에 지었는데 신태라 감독이 미술팀에 보여 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이 영감의 실마리가 됐다. 하늘은 맑은데 집과 그 주변은 깜깜한 밤으로 표현된 그림. 정점석 미술실장은 “원래 목욕탕이었던 집인데 넝쿨로 덮인 밖에서 안의 거실과 지하 목욕탕으로 들어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포물 ‘므이’는 이국적인 비주얼로 섬뜩한 느낌을 재현한다. ‘므이’는 베트남어로 ‘10’을 뜻하며 촌스러운 여자 이름도 된다. 100년 된 초상화에 대한 전설을 파헤치는 내용. 대부분 베트남에서 촬영했는데 주인공(차예련)의 집은 프랑스풍 소품(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상류층의 집은 프랑스풍)으로 고급스러운 공포감을 조성했다. 초상화 속 여인 므이의 집은 물가에 대나무와 풀로 만들고 나중에 므이가 목을 매다는 큰 고목을 심었다. 집과 나무가 연결돼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공포의 포인트.

사실 공포영화에서 비주얼은 오히려 공포를 방해하기 쉽다. 공포는 본질적으로 암흑에서 오기 때문. ‘뭔가 보여 줘야’ 하는 상업영화에서 공포의 비주얼은 그래서 더 고민거리다. 더구나 장르의 특성상 촬영 장소를 빌리기 힘들어 대부분 세트 촬영을 해야 해 시간과 돈은 많이 든다.

한국 공포영화는 2003년 ‘장화,홍련’ 이후 비주얼에 힘을 주기 시작했고 이를 베낀 ‘앤티크 비주얼’이 붕어빵처럼 쏟아져 나왔다. ‘장화,홍련’에서 비주얼을 총괄하는 ‘프로덕션 디자인’ 개념을 처음 도입한 조근현 미술감독은 “무조건 ‘장화,홍련’처럼 해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일단 시나리오가 참신해 텍스트만 읽어도 섬뜩한 맛이 있어야 한다”며 “그러나 집에서 혼자 읽어도 전혀 무섭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한몫 챙기겠다는 기획물이 범람해 콘셉트 없는 비주얼도 많았다”고 지적했다.

대전=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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