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SF장르의 매력은 테크닉이나 과학기술에 대한 매혹에 있지. 난 SF영화를 좋아하고 호의적인 편인데도 ‘내츄럴 시티’에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어. SF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거든.
심=두 번 영화를 봤는데 처음 볼 땐 재미있었어. 연출 자체가 스펙터클을 위한 장치를 열심히 만들었잖아. 공중에서 도시를 내리찍고, 건물을 수직으로 훑고, 우주왕복선이 하늘로 오르는 등 화면으로 압도하고 싶은 감독의 욕망이 읽히더라.
남=SF장르는 기본적으로 바탕에 과학을 깔고 있어야 해. 하지만 우리는 기술을 이용하고 응용하지만 그게 우리 삶, 철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성찰하기에는 아직 연륜이 부족해. 그래서 소수의 마니아만 빼고 일반 관객들은 SF장르에 대해 별 애정을 못 느끼는 것 같아. 누군가 SF장르가 대중적 관심을 끌려면 그 사회의 미래가 밝아야 한다고 말했지. 현실이나 미래가 암울하면 과거 지향적 영화를 좋아한다고. ‘친구’도 IMF 외환위기 때 인기를 끌었잖아. 아마도 지금 상황이 밝지 않으니까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질 만한 여력이 없는 건 아닐까.
심=그건 좀 지나친 해석 같은데.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SF장르를 만드는 것보다 오히려 스펙터클에 대한 욕망이 컸던 거야. 큰 것, 상상력을 발휘할 만한 계기를 찾다보니 미래의 세트,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할 만한 SF영화로 낙착된 거지. 그런 점에서 5년 전 제작기획 당시 잘못된 계산이 있었던 것 같아. 크기의 경제학에 현혹된 건 아닐까. 50년대 미국의 SF영화에는 공산주의라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어. ‘쉬리’ 역시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면서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거지. ‘내츄럴 시티’는 스펙터클 영화로 기획됐을 뿐 이 같은 심리적 착종 지점이 없어. 관객들의 심리적 욕망을 SF안에 끌어오는 힘이 부족해. 인공성과 기술력만 남은 거지.
남=그건 실패의 길을 걸었던 한국 SF 대작들이 시각적 기술적으로 볼 만한데 내러티브나 캐릭터가 빈약하다는 말과 통하지 않을까. 이 영화에는 ‘인간이 사이보그를 좋아한다’는 치명적 사랑,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는 사이보그를 제거하는 임무, 즉 액션 등 두 개의 내러티브가 있어. 두 이야기를 따라가는 실험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거지.
심=난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분열적이라고 생각해. 한국적 멜로에 할리우드식 반전, 감독은 왜 분열적 얘기를 억지로 이어 붙이려고 했을까. 흥미로운 부분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를 오마주 했다고 감독이 얘기하면서 솔기를 드러내듯 그 점을 확실히 노출한다는 거야. 그럼에도 두 영화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어. ‘내츄럴 시티’에서는 주인공 R가 사이보그인 리아의 죽음을 거부하려고 하지. R에게 있어 리아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야. 서구에서는 사이보그를 인간의 대체 가능한 존재로 보지. ‘블레이드 러너’는 정체성의 의미, 자신의 기억이 진짜냐 가짜냐를 다룬 작품이야. 이에 비해 ‘내츄럴 시티’에서 리아가 ‘내 기억 속에 R가 너무 많아’라고 말해. 한국인은 타인의 기억에 의존해 자신을 만들어갈 뿐 정체성에 대해선 묻지도 않아. 특히 이 영화에는 비장미(悲壯美)의 강박이 있어. R가 지독한 사랑을 포기하고 우정과 대의를 선택하는 점이 비장미의 원천이지. 서양인은 이해 못하지만 한국인은 다 이해하는 이야기, 그 내러티브가 바로 2000년대 한국의 원형성을 보여주지.
남=영화 내내 R가 친구 말 안 듣고 버티다가 마지막 10분 동안 갑자기 사랑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나선다는 게 이해가 안 돼. 한국적 내러티브는 논리나 인과가 아니라 정서를 중시하는데 이 영화는 왜 둘이 사랑하게 됐는지 설명이 없어. 관객들에게 뭔가 느끼게 해야 하는 내러티브의 임무를 망각한 거지. 국내의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도 내러티브의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았기에 실패했다고 봐.
심=그건 지나치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아닌가. 난 영화언어나 연출적 측면에서 감독이 고민을 덜한 점이 아쉬워. 시온이 원치 않는 몸을 팔 때, R가 리아를 구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비가 내리지. 때론 감상이 지나쳐. 슬로 모션, 빠른 편집, 와이어액션 등은 매트릭스를 참조한 것 같아. 영화를 볼 때 최고로 멋진, 분칠한 여자를 보는 듯한 아쉬움이 있어. 틀을 깨려하기 보다, 틀 안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감독의 열망이 오히려 창의력의 발목을 붙잡은 것 같아.
남=오마주란 경의를 표하고 싶은 장면을 그대로 갖다 쓰거나 분위기를 차용하는 방식이지만, 그건 형식적 측면일 뿐이지. 원작이 갖는 정신을 살렸는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이 영화는 SF 영화들을 차용했지만 원작의 정신을 구현한 측면은 별로 없지.
심=그래도 오마주 대목은 분명 평가할 점이 있어. 시온의 집 세트, 폐허가 된 강북, 뉴욕의 마천루를 연상시키는 강남 신도시 등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는 별 손색이 없어.
남=할리우드에 버금갈 만한 기술력을 보여주면서도 어디서 본 듯한, 일종의 데자부 현상의 연속인 듯한 점이 아쉬워. 우동과 우산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병사들이 하수도를 지나가는데 물 속에서 사이보그가 툭 튀어나오는 것은 ‘에일리언’에서 각각 따온 듯한 장면이잖아. 기발하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은 거의 없어.
심=일부러 드러내놓고 모방한 것은 감독이 ‘출생의 근원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해. 감독의 궁극적 야심은 정교한 그래픽을 써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게 아니었을까. ‘영혼건’ ‘엠피’ 등 신조어 활용, 사이보그 폐기방식이나 마천루가 들어찬 미래도시 등에서 감독이 자신만의 소우주를 창조한다는 야심을 극한까지 추구한 거지. 문제는 상상력의 부족이지 열망의 부족은 아니라고 생각해.
남=소우주를 재현하는 것도 내용이나 캐릭터, 철학적인 게 뒷받침돼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 형식과 이미지에 치우친, 그래서 분칠한 느낌을 주는 이유도 다른 부분이 이미지를 못 따라오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블레이드 러너’가 돋보이는 이유는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라는 철학적 질문과 문제의식이 담겨 있어서잖아.
심=SF영화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우주의 미래를 다룬 두 종류가 있어. 그런데 국내 SF는 기술적 베이스가 없으니 디스토피아적 주제만 다뤄왔지. 아직까지 우리에겐 우주는 심리적으로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정리=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토론을 마치고▼
‘로드 무비’를 사랑하는 아내와 SF영화를 좋아하는 남편. 둘 사이는 늘 팽팽하다.
남=세상엔 매뉴얼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 두 부류가 있지.
심=당신은 나랑 살기 전에 나라는 사람의 매뉴얼을 읽었어?
남=당신은 매뉴얼이 없지. 있었으면 진작 읽었지.
심=무슨 뜻이지?
남=그러니까 기술이나 기계와 사람은 다르다는 말이지.
심=그건 당신을 유혹하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어. 내 매뉴얼은 평생 안 보여줄 거다. 설사 오작동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래도 ‘나의 미로 속에 길을 잃게 하면 그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아내의 전략은 남편의 매뉴얼 찾기보다 한수 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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