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어바웃 슈미트'…산다는 건, 60대 노신사의 독백

  • 입력 2003년 2월 27일 17시 58분


코멘트
'어바웃 슈미트' 사진제공 무비&아이
'어바웃 슈미트' 사진제공 무비&아이
사무실 한켠에 가지런히 정리된 짐 박스. 책상위에는 코드가 뽑힌 전화기와 007 가방이 썰렁하게 놓여있다. 그 옆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고 벽시계를 응시하는 60대 중반의 노신사. 시계가 정확히 오후 6시를 가리키는 순간 그는 담담히 일어나 사무실을 나선다. 이것이 그가 이곳에 머무는 마지막 순간이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첫 장면은 이처럼 단조롭기 짝이 없다. 이어지는 퇴임 기념 파티장에서도 슈미트(잭 니컬슨)는 오가는 인사를 씁쓸한 웃음으로 되받을 뿐 말이 없다. 벽시계를 바라보던 그의 모습처럼,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시간이 지나가주기를 기다리는 일 뿐.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어제같은 의미없는 삶 속에 작은 변화들이 일어난다. “하루 77센트면 불쌍한 어린이를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TV 구호캠페인에 이끌린 슈미트는 탄자니아의 6세 꼬마 엔두구의 양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엔두구가 영어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치 않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엔두구라기보다 슈미트 자신이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이 편지를 통해 생애 처음 자기 자신을 차분히 돌아본다.

“엔두구에게. 나는 네브라스카 오마하에 살고 있는 슈미트야. 난 예순 여섯살이고 얼마전 회사를 그만두었단다. 보험회사의 중역이었는데…, 새파란 놈에게 밀려나고 말았지. 아내는 먹는데 집착하고 말 끊는게 취미인데다 냄새는 왜 그리 나는지. 변기 커버에 오줌이 튄다며 앉아서 소변을 보라고 하질 않나!”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뇌졸중으로 죽자 그는 노후에 여행다니려고 사둔 캠핑카를 몰고 덴버에 사는 딸 지니(호프 데이비스)를 찾아 나선다. 그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믿었던 딸은 다단계 판매업을 하는 형편없는 남자를 사윗감이라고 소개하고 아버지의 반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사위는 장인을 상대로 사기 칠 궁리만 하고 사부인은 목욕을 같이 하자며 슈미트를 유혹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슈미트의 삶은 ‘있으나 마나’한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가 엔두구에게 편지로 “난 누구의 인생도 바꾸지 못했다. 내 인생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것처럼.

그러나 얼마 후 탄자니아로부터 날아온 엔두구의 답장에서 그는 ‘삶의 가치란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답장에는 엔두구와 슈미트가 나란히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한 수녀는 “엔두구는 온종일 당신 생각뿐이며 당신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개인의 일생에 있어 성공과 실패란 획을 긋기 어려운 경계다. 누구에게나 삶은 남루하고, 동시에 소중한 것임을 잔잔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산다는 게 다 그렇지’라는 씁쓸한 자조를 기분좋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 영화로 12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진기록을 수립한 잭 니컬슨의 호연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12세 이상 관람가. 3월 7일 개봉.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