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애니 축제] "이제 애니와 실사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 입력 2000년 8월 25일 17시 57분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에 네티즌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당초 24일부터 현지 리포트를 시작한다고 공고를 하고, 하루 늦게 소식을 전하게 된 점 정말 죄송합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번 페스티벌에 한국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관을 해 비행기표가 6월 달에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 전날인 23일에서야 겨우 자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23일 떠나려고 했던 당초 계획이 하루 연기되면서 히로시마 현지 리포트도 하루 늦게 됐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네티즌께 공식으로 알린 사항을 지키지 못한 점 백배사죄하고, 그 죄를 갚기 위해 히로시마 페스티벌이 끝날 때까지 생생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겠습니다. >>

지난 24일 한국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전국적으로 내렸지만, 히로시마는 한낮의 최고 기온이 34도를 웃돌 정도로 늦여름의 심술이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제 8회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열리는 아스텔 플라자 안은 2년 만에 열리는 페스티벌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8회 히로시마 페스티벌의 최대 화제는? 아마 행사가 생긴 이래 한국에서 가장 많은 참관단이 온 것일 것이다. 지난 96년 제6회 행사때 애니메이션 제작 붐을 타고 대규모 참관단이 방문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도 더 많이 왔다는 것이 행사장에서 만난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의 이야기이다. 계원조형예술대와 홍익대에서 본선 진출작이 두 편이나 나와 작가와 동료들이 대거 찾아왔고, 그외 애니메이션학과 학생, 인터넷의 애니메이션 사이트 관계자들, 국내 제작사 관계자들, 일반 마니아 등 약 400여명이 이번에 히로시마를 찾았다. 덕분에 행사장의 공식어가 한국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서 친숙한 우리말을 들을 수 있다.

▲ 세상을 떠난 남편과 함께 히로시마 축제를 이끌고 있는 기노시타 사요코(左)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국제기구인 ASIFA 회장 미셀 오셀로(中) 일본 순수 애니메이션계의 거목 쿠리 요지(右)

기획특집을 통해 이미 소개했듯이 히로시마 페스티벌은 애니메이션과 관련이 없는 이벤트성 행사나 견본시, 업계 부스 등이 없기 때문에 개막일이라고 해도 그다지 북적거림이 없다.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래도 명색이 국제 행사인데 너무 썰렁한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

특히 페스티벌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일본 ASIFA 회장 기노시타 렌초가 세상을 떠난 후 지난 7회 페스티벌이 눈에 띠게 위축돼 올해 행사도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많았다. 그런 우려를 뒷받침하듯 올해 페스티벌의 기획 프로그램이 "예년만 못하다"는 지적이 이미 행사 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경쟁 부문만 놓고 본다면 이런 우려는 지나친 걱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총 16편의 작품이 상영된 경쟁 부문은 필자가 지난 94년부터 지금까지 참여한 네번의 히로시마 페스티벌중 작품의 소재와 완성도 면에서 가장 탁월했다.

물론 상당수의 작품이 다른 페스티벌에서 이미 소개됐던 작품.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이 아카데미에 나온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듯이 금년에 4대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모두 열리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총 4일간의 경쟁부문 상영 중 하루만 보고 말한다는 것이 너무 성급할 수도 있지만, 이번 8회 히로시마 페스티벌의 특징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

움직이는 것을 찍느냐, 사물을 움직이게 해서 촬영하느냐에 따라 두 장르가 나뉘어진다고 흔히 이론서 첫머리에서 말하지만, 이곳 히로시마에 나온 작품들은 상당수가 실사 장면을 적절히 혼합해 작품의 리얼리티와 다양한 표현력을 얻고 있었다. 특히 로토스코핑이나, 픽실레이션 등 실사를 응용하는 기법으로 다듬어진 영상들은 오히려 손으로 그린 것보다 더 다양한 느낌과 활력을 주었다.

▲ 가장 유력한 대상 후보 <노인과 바다>▲ 섬세한 표현력으로 <노인과 바다>의 강력한 경쟁작으로 떠오른 <하루가 시작 할때>

▲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따온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파라오>▲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 <푸가>

◀ 인형의 정교한 동작과 섬세한 조명, 카메라의 움직임이 으시시하면서도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페리워그 -메이커>

페스티벌이 시작되기 전부터 경쟁 부문에서 가장 유력한 그랑프리 후보는 알렉산더 페트로프의 <노인과 바다>였다. 이미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과 앙시 페스티벌에서 수상했기 때문에 그 기세로 본다면 이번 히로시마에서도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그랑프리를 수상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었다. 특히 페트로프가 <송아지> <인어> 등 히로시마 페스티벌에 작품을 출품할 때마다 매번 수상을 할 정도로 인연이 깊어 더욱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경쟁부문 첫날 보여준 작품들을 보면 <노인과 바다>의 그랑프리 수상은 결코 쉬울 것 같지 않다. 올해 앙시에서 대상을 탄 웬티 틸비와 아만다 포비스의 <하루가 시작될때(When the Day Breaks)>는 여성다운 섬세한 묘사와 도시인의 일상을 동물들의 모습을 빌려 우화적으로 표현한 아이디어, 그리고 적절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는 연출력 등 여러 부분에서 돋보이는 수작이다.

경쟁부문 첫작품으로 상영된 베테랑 폴 드뤼센의 <3인의 실수> 역시 신데렐라, 백설공주, 빨간두건 등의 동화와 할리우드 서부극의 특징을 패러디한 블랙 코미디로 만만치 않을 저력을 과시했고, 조지 슈비츠게벨의 <푸가>는 96년 히로시마 그랑프리 <리페테>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콘티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탄성을 자아냈다.

이밖에 이집트 상형문자를 로토스코핑 기법을 통해 코믹하고 섹시하게 재현한 세르게이 오브차로프의 <파라오>, 현대 매스 미디어의 위력과 그 폐혜를 시니컬한 풍자로 묘사한 파벨 쿠츠스키의 <미디어>, 아드만 특유의 익살이 돋보인 <험드럼> 등도 관객들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다.

앞으로 남은 3일의 경쟁 부문을 다 봐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첫날부터 보여준 한걸음 앞서가는 실험적인 기법과 다양한 소재, 그리고 그것을 아울러 끌고 가는 능숙한 이야기 솜씨들은 새삼 히로시마 페스티벌의 묵직한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히로시마 김재범<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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