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와 함께 주말을…3편 동시개봉

  • 입력 2000년 3월 2일 19시 57분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한국영화 세 편이 동시에 개봉된다. 자연주의 멜로를 표방하는 ‘산책’,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불안한 현대인을 그린 ‘구멍’, 병원을 무대로 한 멜로영화 ‘종합병원 The Movie 천일동안’ 등 눈길을 끄는 대작은 아니어도 나름대로의 개성을 갖춘 세 편의 영화를 들여다 보면….

▼구멍▼

‘구멍’. 에로틱한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이 작품의 관심사는 불확실한 현대인의 의식이다.

시종 어두운 화면을 배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도시를 헤매지만 불확실한 기억의 터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영화는 1999년 12월 어느 날 외과의사인 ‘나’(안성기 분)가 낯선 별장에서 아침을 맞은 뒤 다음날 아침 한강에서 추락한 자동차 안에서 발견되기까지 하루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나는 수술과 아내와의 이혼소송을 처리하면서 전날 밤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자신을 섹스 도구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며 떠난 애인 선영(김민)이 보낸 테이프를 듣는다.

영화는 선영이 보내온 테이프의 목소리를 매개체로 현재와 과거, 또는 그 이전의 사건들을 수시로 교차시키면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영화 속에서 명확한 것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주인공 나는 겪고 있는 일들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한다. 이 외롭고 불안한 현실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다고 믿는 선영도 이름 석자와 예쁜 배에 남겨진 맹장수술의 흉터로 기억될 뿐이다.

소설가 최인호의 동명소설이 원작. 충무로에서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김국형 감독의 데뷔작.

흥행이라는 솔깃한 ‘구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 연출자의 투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8세 이상 관람가. 4일 개봉.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산책▼

길 모퉁이의 작은 레코드 가게와 항상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음악, 언제나 똑같은 모습의 30대 주인. ‘산책’이 그려내고 있는 영화 속의 풍경이다.

이 작품은 음악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뒤 10여년간 ‘인생의 오선지’를 뛰어다닌 대학 동기 네 명의 세상살이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병렬적으로 각자의 사연을 더듬다가 콘서트를 준비하는 모임을 통해 그들이 합쳐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레코드 가게를 하는 영훈(김상중 분)은 첫사랑 세희(유호정)가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는 친구들과의 정기 콘서트 날짜가 다가오자 공연 준비를 위해 음악에 이끌려 찾아온 연화(박진희)를 종업원으로 채용한다.

97년 ‘편지’로 72만명(서울기준)을 기록한 이정국감독(44)이 연출을 맡았다.

‘산책’은 ‘편지’로 형성된 이감독 영화에 대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두 작품 모두 작으면서도 맑고 건강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편지’가 불치병을 소재로 눈물에 호소하는 신파적 분위기가 짙은 반면, ‘산책’은 일상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주제 뿐 아니라 거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화면과 어쿠스틱 기타음이 주조를 이루는 음악 등 386세대 또는 그 이전 세대의 감성과 맞닿아 있다.

자연주의 멜로 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스토리가 밋밋한 편이어서 ‘편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12세이상 관람가. 4일 개봉.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종합병원▼

‘종합병원 The Movie 천일동안’은 제목에서 금방 알 수 있듯, 90년대 중반 인기 TV드라마인 ‘종합병원’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영화. 신은경이 드라마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TV드라마 ‘종합병원’을 연출한 최윤석 PD의 감독 데뷔작.

영화 초반부 인물들의 성격묘사와 에피소드는 TV드라마와 유사하다. 그러나 레지던트 초년생들의 고된 생활을 훑던 영화는 중반부에서 갑자기 삼각관계 연애담으로 돌변한다. 직업을 위해 여성성은 포기했지만 서늘한 매력이 있는 승현(진희경 분)과 중성적 이미지의 은수(신은경)는 시완(최철호)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문제는 두 여자가 동시에 매달리는 게 납득될 만큼 시완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

후반부에 접어들면 영화는 노골적으로 ‘눈물의 멜로’를 지향한다. 감상적인 음악이 계속 흐르고, 은수는 암에 걸리고, 돌아온 시완은 은수의 안락사를 돕는다. 그러나 안쓰럽게도 영화 속 감상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긴 어려울 것같다. 제주도 바닷가에서 촬영된 장면들은 CF처럼 예쁘지만, ‘닭살이 돋는’ 유치한 상황 설정 때문에 헛웃음만 터져나올 뿐. 이 영화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하나의 이야기조차 제대로 못하고 말았다. 차라리 TV드라마 ‘종합병원’을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인기드라마의 명성 속에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나을 뻔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4일 개봉.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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