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정경순 주연 「엄마 안녕」…19일부터 산울림극장

  • 입력 1998년 5월 11일 09시 39분


어느 평범한 날의 저녁, 세상에서 가장 힘겹고도 슬픈 이별이 시작된다. ‘엄마 안녕’(산울림)

찾아오는 손님없이 두 사람이 서로 등 기대어 조용히 살아가는 모녀 셀마(손숙 분)와 제시(정경순)의 집.

여느날처럼 엄마 셀마는 간식거리인 컵케이크와 땅콩엿이 없어졌다고 툴툴대는데 낡은 수건과 쿠션, 세상 떠난 아버지의 총을 찾던 딸 제시가 ‘나 내일 외출해요’하듯 아무런 높낮이 없이 툭 내뱉는다.

“내가 날 죽이려구 해요. 엄마 …한두시간 안에.”

엄마의 온갖 질문과 애원 비난에도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수면처럼 잔잔하기만 한 제시. 혼자 남을 엄마를 위해 “케이크배달은 어떻게, 약 주문은 어떻게, 그릇은 어디 있고…”라는 식으로 헝클어진 서랍속을 정리하듯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들을 차근차근 엄마에게 확인시키려 애쓴다.

인생에 마지막 남은 한두시간. 딸의 손을 삶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엄마와 이미 자살로 마음을 결정한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누는 진솔한 대화 속에서 두 사람 가슴속의 숨은 상처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잦은 간질 발작 때문에 명석한 머리를 가졌음에도 직장 하나 변변히 구할 수 없었던 제시. 남편과는 이혼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좀도둑질과 마약으로 진창에 빠진 인생. 늙고 병들어 몸놀림이 자유롭지 못한 엄마의 손발이 되어주는 게 유일한 역할이지만 그나마도 썩 훌륭한 파트너는 못된다.

딸과 달리 낙관적인 엄마에게도 문제는 있다. 간질을 앓는 딸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할 때까지 발병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맹목적인 모성. 딸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결혼시키고 이혼 후에는 딸을 떠맡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엄마의 사랑법이다.

갖은 설득에도 고개를 내젓는 딸에게 자탄과 분노에 차서 엄마가 터뜨리는 말.

“그래, 네 인생이 엉망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옳아요. 엄만 할 수 없어요. 나 역시 내 인생을 바꿀 수도, 더 의미있게도, 그저 이만하면 쓸만하다 느끼게조차도 못해요. 그러나 내가 꺼버릴 수는 있어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예요….”

두 사람의 이별은 관객에게 ‘반면교사’ 역할을한다.서로를진정으로사랑하는 방식은 달라야했던 것아닌가?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역시 그러하다 해도 결코 함께 넘을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절벽이 있다는것. 절벽을 피해가도록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절벽앞에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었어야 했다는 것을….

딸의 방에서 총성이 울린 후에야 엄마는 울먹인다.

“제시, 제시 내 아가, 날 용서해다우… 난 네가 내 건줄 알았었다.”

울컥울컥 치미는 울음을 내리누르며 처음부터 끝까지 보통빠르기의 차분한 목소리로 제시를 연기하는 정경순. 영화 ‘태백산맥’과 ‘창’에서의 입담 걸찍한 여장부로 그녀를 기억했던 사람이라면 내면의 에너지를 응축시킬 줄 아는 그녀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실제로 세딸을 결혼시켜 타국으로 멀리 떠나보낸 손숙은 매번 연습때마다 딸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 통곡한다.

83년 브로드웨이 초연때는 영화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배우 캐시 베이츠가 제시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극작가 마샤 노먼은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80년대 미국에서 작품을 본 배우 윤여정이 엄마 역을 탐내 번역했던 것을 방송작가인 친구 김수현이 각색한 내력도 있다.

산울림극장의 개관 13주년 기념공연. 연출 임영웅.

19일부터 7월26일까지. 화∼목 오후7시반, 금토 오후4시 7시반, 일 오후3시. 02―334―5915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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