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임금’ 사무직, 근로시간 단축 실효성 논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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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많은 IT업체 등 사무직 41%, 기본급에 수당 미리 정해 포괄지급
줄어든 52시간 기준으로 산정땐 수당만 줄고 근로시간 안 줄 수도
고용부 “지침 만들어 곧 발표”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의 한 게임개발사에서 일하는 20대 A 씨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현재 법정근로시간은 주당 최대 68시간이지만 매주 80시간 이상 일한다. 게임 출시가 임박할 때는 아예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그러나 A 씨의 월급명세서에는 연장 및 휴일근로수당 항목이 따로 없다. 기본연봉 옆에 ‘제(諸)수당 포함’이라고만 적혀 있다. 경력채용 당시 근로계약서를 쓸 때 ‘포괄임금제’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의 연봉은 약 4000만 원. 이를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지만 자신이 일한 시간에 비해선 턱없이 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올해 7월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을 시작으로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지만 A 씨처럼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 사무직이나 정보기술(IT) 근로자에게 근로시간 단축은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포괄임금제를 하는 일부 사업장에선 법정근로시간이 줄더라도 실제 근로시간은 줄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포괄임금제란 기본급 또는 기본연봉에 평일 연장근로나 휴일근로 수당을 포함해 함께 지급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야근을 많이 하는 게임회사들은 주당 근로시간을 법정 한도인 68시간으로 정한 뒤 이에 해당하는 수당을 기본급과 함께 지급한다. 매주 68시간보다 덜 일했다고 수당이 깎이지 않지만 반대로 더 일했다고 해서 더 받는 것도 아니다.

포괄임금제는 노동법에 없는 제도다. 정부 지침에도 관련 규정이 없다. 영업이나 운송, 경비 등 외근이 많고 근로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업종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대법원은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곤란한 업무에 한해 △근로자의 동의를 얻어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하는 조건에서 포괄임금제 적용을 용인하고 있다. 이는 거꾸로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쉬운 사무직 등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기업 8년차 대리인 B 씨는 경영지원직이다. 회사를 출입할 때마다 사원증을 찍어야 해 출퇴근시간이 정확히 산정된다. 하지만 거의 매일 오후 9시쯤 퇴근하는 B 씨는 지금까지 초과근로수당을 받은 적이 없다. B 씨는 “동료들은 포괄임금제를 야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야근의 덫’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사무직 10명 중 4명이 포괄임금제를 적용받고 있다.

포괄임금제를 제대로 활용하면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 편리한 대목이 있다. 매번 근로시간을 일일이 산정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어서다. 하지만 A 씨 회사처럼 포괄임금으로 정한 시간보다 더 일을 시키고도 수당을 적게 주려고 포괄임금제를 도입한 사업장이 적지 않다.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 근로자는 주당 80시간을 일했어도 사전에 근로시간을 68시간으로 약정했다면 수당을 더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결국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안이 시행돼도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사업장은 실효성이 낮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임금만 줄고 근로시간은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대법원 판례를 반영한 포괄임금 관련 지침을 만들어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사무직은 근로시간 측정이 가능한지에 따라 포괄임금제 적용 가능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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