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무엇’보다 ‘왜’가 중요… 생각 담는 인문디자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디자인, 인문학적 접근 강조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업체 파나소닉을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서구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와 “앞으로는 디자인의 시대”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을 한 시점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라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실제로 20세기 일본의 산업화에는 디자인이 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파나소닉, 소니, 혼다, 그리고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잡화점 브랜드 무인양품과 서점 체인 쓰타야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근대화는 디자인 경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1979년 각료회의에서 “Design or Resign(디자인하지 않으면 사임하라)”이라고 했다고 한다. 국가가 주도해 디자인을 산업 혁신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영국은 산업디자인의 선도국가로 재탄생했다.

이처럼 디자인을 중시하는 경영 관리는 20세기 기업 혁신 동력의 일환으로 각광받아 왔다. 하지만 최근엔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기업계에 디자인 경영이 일반화됨에 따라 더 이상 기술이나 외형 중심의 산업디자인만으로는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기가 어렵다. 기술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시각적인 스타일링은 새로운 혁신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어렵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문디자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 산업디자인에서 인문디자인으로

종래의 산업디자인은 디자인을 주로 도구적 관점이나 외형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보다 편리한 도구, 보기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놓치기 쉬웠다.

부분에 집착하는 산업디자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글래스다. 구글글래스는 안경에 초소형 카메라와 영상 기능을 부착한 혁신적인 제품이었지만, 부분적인 편리함에만 집중한 탓에 전체적인 편안함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인간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외부의 대상을 거울처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구글글래스는 이렇게 세상을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눈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결국 이 제품은 상용화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인문디자인은 산업디자인과는 달리 디자인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말한다. 어떤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 그것과 관련된 활동, 주변 환경까지 고려한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관점이다.

덴마크의 블록 장난감 회사 레고의 성공 사례를 보자. 레고는 시장조사를 할 때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아이들은 왜 노는가?”에 주목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쉬운 놀이보다는 어려운 놀이에서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레고는 어른도 함께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시간을 요하는 블록 장난감들을 출시했다. 그 결과 사업이 크게 성장했다.

‘무엇’이 도구적 관점에서의 물음이라면, ‘왜’는 인문학적 차원의 물음이다. 레고는 인문디자인의 시각을 통해, ‘장난감’이라는 도구를 ‘놀이’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와의 연관 속에서 접근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 ‘무(無)’를 디자인한 무인양품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특정 학문이나 고전(古典)에 대한 소양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는 특정 분야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 즉 ‘리버럴 싱킹(liberal thinking)’에서 비롯한다.

새로운 생각을 담는다는 의미에서의 인문디자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일본의 생활용품 브랜드 무인양품이다. 보통 ‘MUJI’라는 브랜드명으로 불리는 무인양품은 “특징 없는(無印) 좋은 제품(良品)이라는 뜻이다. 아무런 특징을 표방하지 않는 것이 이 기업의 특징인데,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비움의 철학이 깔려 있다.

동양철학에서 ‘무’는 존재의 결여가 아니라 있음의 바탕이다. 채움을 가능하게 하는 비움이다. 노자는 “우리가 방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방이 비어 있기 때문으로, 그 ‘무’가 있어야 ‘유’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무인양품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든 특징과 어우러질 수 있고, 유행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무인양품의 전 회장 마쓰이 다다미쓰에 의하면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에 무인양품의 철학에 공감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물건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 담긴 심플한 라이프스타일에 공감을 하는 것이다. 기존 산업디자인은 ‘양품’이라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무인’과 같은 생각의 측면을 소홀히 한 경향이 있다.

○ 샤넬의 시(詩)적인 혁신


최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문을 연 샤넬 매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인문디자인 사례다. 이 매장은 전통 양식의 벽돌건물을 쓰는데, 매장 전면을 통유리가 아닌 유리벽돌로 만든 벽으로 꾸몄다. 이 투명한 벽을 만들기 위해 기존 콘크리트보다 더 강력한 유리를 만들었고 접착제가 닿는 부분 역시 투명하게 처리해야 했다.

간편한 전면 통유리를 놓는 대신 첨단기술을 동원해 유리벽돌로 벽을 쌓은 이유는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유지하면서 샤넬 매장으로서의 기능을 살린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이다. 벽의 의미를 재해석함과 동시에 근대가 잃어버린 전통문화를 현대적 기술로 발전시켰다. 이 매장을 만든 건축사무소 MVRDV는 이 작업을 ‘시적인 혁신’이라고 표현했다.

시란 은유의 언어로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벽돌 같은 유리’를 보여줌으로써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다. 흔히 혁신이라고 하면 과거를 모두 부정하는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샤넬은 과거 속에서 혁신을 일으킴으로써 혁신이라는 의미 그 자체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시적 혁신에서는 고전이 곧 혁신인 셈이다.

○ 인문학과 디자인의 만남

‘리버럴 아츠’로서의 인문학은 새로운 사고의 원천이다. 기존의 사고 틀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문디자인은 그런 인문학과 디자인의 만남이다. 기술과 트렌드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사람과 도구의 근원을 먼저 생각해 소프트한 창의력을 만들어 나가는 활동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업들은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잘 찾지 못하고 있다. 인문디자인이라는 개념은 더더욱 생소하다. 기업이나 관공서와 같은 거대조직에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인 디자인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을 단순 교양 수준에 머무르게 하지 말고 제품의 급진적 혁신과 조직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인문디자인 방법론’을 사용한다면, 오늘날의 인문학 열풍은 기업에 혁신의 기회로 다가올 것이다.

김경묵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장 formook@naver.com
정리=조진서 기자 cjs@donga.com
#디자인#인문학#인문디자인#레고#샤넬#무인양품#산업디자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