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 지켜온 정미소 대표 “배운 게 많으면 앉은뱅이 밀 진즉에 버렸겠지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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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밀가루라 하면 수입 밀을 떠올린다. 그나마 국산 밀도 대부분 수입 밀을 개량한 종자. 하지만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밀이 엄연히 존재한다. 기원전 300년부터 심어온 '앉은뱅이 밀'이다. 1970년까진 인기였지만 수입밀이 밀려오며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이 앉은뱅이 밀을 3대째 우직하게 지켜온 이가 있다. 주인공은 경남 진주에 위치한 금곡정미소의 대표인 백관실 씨(66). 최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백 씨는 기계 일을 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금곡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정미소가 1916년경 세워졌으니 올해로 꼬박 100년을 맞이했다. 할아버지는 가업을 이으라는 뜻에서 그가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농사를 짓게 했다. 당시 진주를 포함해 남부 지방에서 활발했던 앉은뱅이 밀농사를 백 씨는 그렇게 시작했다.

"밀이 작아서(50~80cm) 앉은뱅이 밀이라 불렀지예. 수입 밀하고 달리 찰지고 부드럽고 고소해서 국수나 수제비 재료로 인기였지예. 글루텐 함량도 낮아서 더부룩한 느낌도 없고 속이 편하다 아닙니까."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84년 정부가 국산 밀 수매를 중단했고 농부들은 팔 곳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농사를 포기했다. 그는 확신이 있었다.

"앉은뱅이 밀은 우리 땅 풍토에 적합해 병충해에 강하지예. 늦가을에 파종해 추운 날씨에 자라 따로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란다 아닙니꺼. 농사짓기 쉽고 표백제·방부제 처리 안하니 사람 몸에 더없이 좋지예."

그는 농부들로부터 앉은뱅이 밀을 사들여 계약재배하기 시작했다. 수입 밀보다 비싸 본전조차 건지지 못하는 해가 허다했다. 백 씨는 양봉과 축산, 과수농사 등을 가리지 않고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으로도 역풍을 맞았다. 개량종인 금강밀과 조경밀이 확산됐는데, 경질밀인 이 밀들은 맛없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연질밀인 앉은뱅이 밀도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백 씨는 '이 맛있는 밀을 왜 몰라줄까'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토종 씨앗의 대부'인 안완식 전 농촌진흥청 연구관이 2012년 백 씨를 방문해 앉은뱅이 밀을 발굴하면서 대중화 계기가 마련됐다.

"앉은뱅이 밀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거쳐 미국에 흘러갔지예. 미국 농학자(노먼 볼로그)가 이 밀을 개량한 '소노라 64호'를 개발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밀 품종이 됐다 하데예."

앉은뱅이 밀이 소노라 64호의 조상 격인 셈이다. 이 밀은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2013년 '국제슬로푸드본부'가 이끄는 '맛의 방주'(Arck of Taste·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지키기 위해 지정)에도 등재됐다.

국산 밀 자급률은 1.2%(2015년 기준). 백 씨는 승산이 있다고 본다. 쌀 소비는 줄어도 밀 소비는 늘고 있고 음식에 신경 쓰는 사람도 늘고 있어서다. 앉은뱅이 밀은 호텔이나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 등에 납품되고 있고 100kg씩 사가는 '큰 손 고객'도 있다. 재배물량(연 250~300t)은 직거래로 '완판'된다. 종자를 달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널리 퍼져야 한다는 뜻에서 기꺼이 씨앗을 내어준다.

백 씨는 최근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홍문표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로 있는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국회 농업과 행복한 미래'의 토론회에 연사로 나서 앉은뱅이 밀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학 가서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 된 고향 친구들 보면 부러웠어예. 그런데예…. 나이 들어 보니 친구들은 제가 더 유명해졌다고 부러워하데예. 제가 유식하고 배운 게 많으면 앉은뱅이 밀을 진즉에 버렸겠지예. 작은 씨앗 하나라도 물려주는 일, 돈이 안 되도 잘 하렵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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