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구조조정에 韓銀 끌어들여 ‘부채 공화국’ 비난 피할 셈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3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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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어제 집행간부회의에서 “기업 구조조정은 우리 경제의 중요한 과제이며 한은이 필요한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재원 마련에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한다는 정부의 ‘한국형 양적완화’에 협력하겠다는 의미다. 구조조정을 위해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면 재정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던 한은이 대통령까지 압박하자 결국 항복을 한 것이다.

구조조정 대상인 조선·해운업종의 부채만 78조 원이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의 빚을 메우느라 작년 말부터 4조2000억 원을 퍼주고 있다. 조선·해운업 좀비기업의 부실을 털어내기 위해 기존 대출을 자본으로 전환하거나 신규 대출을 하느라 국책은행마저 부실해지기 전에 한은이 산업·수출입은행에 ‘실탄’을 장전하라는 것이 한국형 양적완화의 핵심 내용이다.

기획재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할 경우 국회 통과에 시간이 걸리므로 한은이 나서야 한다지만 국회에서 책임 추궁을 피하려는 꼼수가 아닌지 의문이다. 박근혜 정부 3년간 국가채무 증가액이 147조 원으로 이명박(MB) 정부 5년 증가액보다 많았다. 총선 전 야당은 “정부 수립 이후 2007년까지 국가채무 총액이 299조 원인데 새누리당 정부 8년간 나랏빚이 590조5000억 원으로 늘었다”고 공격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 흑자였던 재정수지는 MB 첫해인 2008년부터 8년 연속 적자다. 정부가 또 빚을 늘린다는 비난을 면하려고 재정 대신 한은의 팔을 비틀어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의도가 역력하다.

산업 곳곳에 부실의 암 덩어리가 커진 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산업 구조조정에 미온적이었던 정부 탓이 크다. 특히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는 금융시장 안정, 자율경영 등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곪은 상처 덮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영업이익으로 빚도 못 갚는 좀비기업이 2010년 24.7%에서 2015년 1분기 34.9%로 늘어났다. ‘폭탄 돌리기’만 하다 30조 원에 이른 은행권의 부실채권으로 불꽃이 튄다면 국가적 재앙을 부를 수 있다.

한은도 팔짱만 끼고 있어선 안 되겠지만 구조조정의 주체인 정부는 뒤로 빠지고 한은을 내세우는 구도는 본말전도(本末顚倒)다. 부실의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산은에 맡기기로 한 정부가 수술비마저 한은에 대라고 한다면 지뢰밭에서 아예 발을 빼겠다는 건가. 정부가 대기업도 퇴출시키겠다는 각오 없이 한은을 통한 자본 확충에 매달리는 것은 대마불사(大馬不死)를 합리화하는 핑계밖에 안 된다.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도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야 하므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추경은 양적완화보다 더 효과적인 정공법이 될 수 있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극복을 위한 추경은 국회 제출 이후 불과 18일 만에 처리됐다. 미국이 한국을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환율에 영향을 주는 양적완화는 위험 부담이 적지 않다. 4일 기재부, 한은, 금융위원회가 참여하는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위한 회의’에서 정부는 구조조정의 전 과정을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나서야만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친 과오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행#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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