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정경준]거짓말쟁이가 말하는 숫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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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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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 산업부 차장
정경준 산업부 차장
수습기자 시절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가 시위대의 숫자를 어림잡아 계산하는 방법이었다. 군중 사이를 돌아다니며 어느 정도 촘촘하게 무리지어 있는지 살핀 뒤 높은 곳에 올라 그들이 점유한 면적을 따져 숫자를 낸다. 주최 측과 경찰의 ‘주장’도 참고한다.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도 다음 날 신문을 비교해보면 천차만별이다. ‘진실’은 하나인데….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슬람의 나라’라는 단체의 지도자 루이스 파라칸은 1995년 여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규합해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백만 인의 행진’을 개최했다. 그때까지 이 광장에서 100만 명 이상이 모인 적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 취임식과 1976년 독립 200주년 행사 등 딱 두 번이었다. 파라칸은 연설에서 “150만에서 200만 명이 모였다”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공원경찰은 항공사진 촬영을 분석해 군중을 40만 명으로 추정했다. 제3자인 보스턴대 사진분석팀은 어정쩡하게 “25%의 오차범위 내에서 87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숫자는 고무줄이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지난해 8월의 일이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2분기(4∼6월) 글로벌 시장에서 122만1000여 대를 판매했다고 발표하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현대·기아자동차가 도요타를 제치고 ‘글로벌 빅4’가 됐다고 보도했다. 도요타의 상반기 자동차 판매가 1분기 179만1000여 대를 합쳐 301만여 대에 그쳤는데 현대·기아차는 같은 기간 319만 대를 팔았으니 맞는 말이다.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났다. 도요타는 평소에는 합산하지 않던 해외 합작회사의 실적까지 보태 상반기 판매대수가 371만 대라고 수정했다. 하루아침에 도요타의 글로벌 판매대수 랭킹이 5위에서 GM, 폴크스바겐에 이어 3위로 뛰어올랐다. 국내 언론은 ‘결과적 오보’를 양산했다.

최근에는 수십조, 수백조 원 차이가 나는 통계가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4월 총선을 앞두고 최저임금 현실화, 반값 등록금, 무상 급식 및 의료, 영·유아 양육수당 지원 확대 등의 복지공약을 내놓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5년간 75조3000억 원(새누리당), 164조7000억 원(민주당)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기획재정부는 양당의 공약을 모두 실현하는 데 5년간 268조 원이 든다고 추산했다. 두 정당이 발표한 액수를 단순 합산한 것보다 ‘겨우’ 28조 원 많지만 중복 공약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더 나아가 기업이 부담해야 하거나 누가 비용을 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간접비까지 포함하면 새누리당 공약에는 5년간 281조 원, 민주당 공약을 이행하려면 572조 원이 든다는 보고서를 냈다. 새누리당 추산액의 3.73배, 민주당 숫자의 3.47배다.

사람들은 큰 숫자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게 내 돈이 아니라면 ‘0’이 13개든(10조), 14개든(100조) 큰 차이를 못 느낀다. 그래서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거나 아예 외면한다. 하지만 이래서는 바보 되기 딱 좋다. 숫자의 출처는 어디인가, 어떻게 숫자를 산출했는가, 숫자를 뽑아낸 이들의 이해(利害)관계는 어떤 것인가 등의 물음표를 던지지 않으면 속기 십상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거짓말쟁이가 말하는 숫자에는 함정이 있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데스크의 눈#정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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