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협 50년]1962년 탄생 수협 2000년대 금융허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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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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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협중앙회는 어촌 근대화를 목표로 1962년 4월 1일 탄생했다. 당시 국내에는 152개 어업조합과 20개 수산조합이 난립했다. 이 가운데 73개 조합을 통폐합해 99개 지구별 어업협동조합(수협)으로 재편했다. 전국의 어업인을 하나로 뭉치게 한 수협의 시작이다.

○ 1960, 70년대: 어업의 기반을 닦다

수협은 1963년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의 수산 관련 자금을 인수해 여신업무를 시작했다. 한일 협정에 따른 대일 청구권자금이 수산업에 투입되면서 1965년에는 어업용 유류 직배사업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했다.

1962년 이후 10년간 한국 경제는 연평균 8%대 성장을 했지만 수산업은 연평균 11.5%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수협의 사업규모도 1962년 18억 원에서 10년 만에 614억 원으로 급증했다. 광주, 진주, 춘천 등 내륙지역에도 수산물 공판장을 설치해 수산물 판매가 증대됐다. 1978년 수협은 수출 1000만 달러를 돌파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 1980, 90년대: 성장의 열매를 나누다

1980년대 수협은 소득증대와 복지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조직도 점차 현대화했다. 대표적인 예가 1981년 시작된 서울지역 고객 자동이체 서비스. 이후 수협은 중앙회 국고대리점 업무, 예금 온라인 업무, 신탁업무 등을 전산화했다.

1986년 수출은 4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1990년대는 자립경영을 위한 ‘대약진 운동’이 펼쳐졌다. ‘3조 원 자체자금 조성운동’은 당초 계획보다 1년 앞선 1992년에 달성했다. 어업인을 위한 영어자금 공급도 1995년부터 매년 1000억 원씩 증가해 1998년에는 수협사상 처음으로 1조원이 넘는 규모의 자금이 공급됐다.

○ 2000년대∼현재: 위기를 기회로

1997년 외환위기는 수협에도 위기였다. 급기야 2001년에는 예금보험공사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 수협 관계자는 이를 “역사상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회고했다. 수협은 2001년 ‘뉴스타트 180 운동’을 시작으로 경영혁신에 들어갔다. 2001년에는 경제사업 활성화를 위해 노량진수산시장을 인수했고, 2005년부터는 기업·단체와 어촌계 자매결연사업을 시작해 현재 그 수는 1117건으로 늘어났다.

2010년에는 수협의 지도사업과 경제사업을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또 지난해에는 국내 최대의 수산물가공처리공장인 인천가공물류센터를 준공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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