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적합업종, 차떼고 포떼고… 대기업 철수는 세탁비누뿐

  • Array
  • 입력 2011년 9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동반성장위, 1차 16개 선정… 나머지 품목 연내 추가검토

27일 서울 중구 소공동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동반성장위원회의 정영태 사무총장(왼쪽)과 곽수근 실무위원장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1차 선정 품목을 발표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7일 서울 중구 소공동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동반성장위원회의 정영태 사무총장(왼쪽)과 곽수근 실무위원장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1차 선정 품목을 발표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고추장과 된장 같은 장류, 막걸리, 떡, 세탁비누 등 16개 품목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선정돼 대기업이 해당 분야 사업을 하는 데 제한을 받게 됐다. 그러나 당초 예상됐던 것보다 품목이 크게 줄어든 데다 수위도 낮아 중소기업계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건 하나도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27일 중소기업 적합업종 1차 선정 품목을 ‘사업이양’ 1개, ‘진입자제’ 4개, ‘확장자제’ 11개 품목으로 나눠 발표했다.

○ 사업이양 품목 하나뿐

총 213개 품목을 대상으로 중소기업 적합업종 여부를 검토해온 동반위는 45개를 1차 선정품목 검토 대상으로 압축해 협의했다. 동반위 주변에서는 당초 이 가운데 30여 개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선정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결과는 이에 훨씬 못 미쳤다. 정영태 동반위 사무총장은 “오늘 발표한 16개 외에 29개 품목을 추가 검토해 10월에 결과를 발표하겠다”며 “1차 검토품목 외에 나머지 173개에 대한 검토 작업도 올해 안에 마무리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확정된 품목 가운데 대기업에 권고하는 수위가 가장 높은 사업이양(대기업이 해당 사업에서 철수해야 하는 것) 품목은 당초 순대, 막걸리, 세탁비누가 논의됐지만 최종적으로 세탁비누만 확정됐다.

관련 대기업인 LG생활건강은 발표 이전에 이미 사업을 접기로 한 상태였다. 순대와 막걸리는 해당 대기업의 반발에 확장자제 품목으로 수위가 낮아졌다.

확장자제(대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을 더는 키울 수 없도록 하는 것) 품목으로는 순대, 청국장, 고추장, 간장, 된장, 막걸리, 떡, 기타 인쇄물, 재생타이어, 절연전선, 아스콘이 확정됐다. 이 가운데 순대, 고추장, 간장, 된장, 재생타이어는 기존 사업 축소 권고도 내렸다.

진입자제(대기업이 새로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 품목은 골판지 상자, 플라스틱 금형, 프레스 금형, 자동차 재제조부품(재활용 부품)이다. 이 가운데 자동차 재제조부품을 제외한 나머지 3개 부품은 확장자제 결정도 함께 받았다.

○ 수위도 후퇴, 기준도 실종

이날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선정품목 발표에서 일부 동반위 실무위원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한 실무위원은 “이럴 줄 알았다. 차 떼고 포 떼고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소리치며 발표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중소기업 측의 요구와 달리 선정품목도 크게 줄었고 권고 수위도 너무 낮다는 불만이다.

논란이 됐던 장류는 CJ, 대상 등 관련 대기업에 정부 조달시장 진입을 자제하고, 저가(低價) 시장에서 철수하며, 중소기업 인수합병을 자제하라는 권고가 나왔다. 하지만 ‘저가’에 대한 기준이나 조달시장의 범위 등은 전혀 결정되지 않았다. 한 중소 식품업계 관계자는 “어차피 대기업 물건 중에 저가는 거의 없다. 대형마트를 장악한 대기업의 고추장, 된장은 건드리지도 않겠다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막걸리는 대기업이 내수 시장에 진입하거나 직접 생산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권고가 나왔다. 그러나 관련 대기업인 하이트진로, 롯데, CJ 등은 유통이나 수출만 하고 있기 때문에 별 영향이 없다.

중소기업계가 자신의 영역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두부와 데스크톱PC, 레미콘, 내비게이션은 아예 1차 선정품목에서 제외됐다. 연식품조합 관계자는 “두부는 논란이 된 대표적 품목인데 아직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빠른 결정을 촉구했다.

권고가 적용되는 대기업의 기준을 놓고도 중소기업법(근로자 300인 이상)을 따르느냐, 공정거래법(자산규모 5조 원 이상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계열사)을 따르느냐를 두고 갈팡질팡했던 동반위는 끝내 일원화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권고 수위가 높은 사업이양 품목에는 공정거래법을, 나머지 품목은 중소기업법을 적용하겠다는 애매한 답만 내놓았다. 16개 품목별로 권고를 받을 대기업의 명단도 밝히지 않았다. 한 실무위원은 “애당초 목표의식이나 원칙 없이 반(反)대기업 정서로 논의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꼴 아니냐”고 지적했다.

○ 구속력 없이 갈등만 키워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단체들은 이날 선정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의 단초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개별 기업들에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갈등의 골을 좁히기는 힘들 것이라는 반응이 우세하다. 더욱이 동반위의 결정에 구속력이나 제재 수단이 없기 때문에 대기업이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현장에서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 중소기업 측 인사는 “전경련이 환영 성명을 낸 것 자체가 대기업 쪽의 결론이라는 증거 아니냐”며 “대기업 이름을 적시해 강제로 규제해도 부족할 판에 이런 정도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산업계 시류에 맞지 않다는 근본적인 비판도 다시 나왔다. 전경련 관계자는 “품목마다 시장이나 기업 상황이 다른데 적합업종을 획일적으로 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기업들이 융합과 복합으로 신성장동력을 찾는 상황에서 특정 사업을 못하게 하는 것은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