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단가 후려치기’에 공장문 닫은 2차협력사 여영일 사장의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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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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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단가인하, 丙에겐 사형선고”

17일 텅 빈 자신의 공장을 둘러보는 자동차 부품 2차 협력업체 아이티모비스의 여영일 사장. 그는 “변호사 댈 돈도 없는 내가 비싼 변호사로 무장한 원청업체를 이길 순 없을 것”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대구=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17일 텅 빈 자신의 공장을 둘러보는 자동차 부품 2차 협력업체 아이티모비스의 여영일 사장. 그는 “변호사 댈 돈도 없는 내가 비싼 변호사로 무장한 원청업체를 이길 순 없을 것”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대구=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공장은 텅 비어 있었다. 3개월 전만 해도 여영일 사장(40)은 기계와 설비가 들어찬 이곳에서 직원들과 자동차 실린더 부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17일 대구 달서구 갈산동 ‘아이티모비스’라는 2차 협력업체가 있던 자리에는 회사 간판만 남아 있었다. 직원 15명을 데리고 지난해 11억92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던 그는 말없이 990m²(약 300평)에 이르는 빈 공간만 바라봤다.

여 사장은 3월 7일 1차 협력업체로부터 780원인 납품단가를 670원으로 14% 내려 달라는 요구를 전자문서로 받았다. 2010년 1월부터 이미 납품한 부품 58만 개에도 같은 가격을 소급 적용해 6389만 원을 따로 달라는 요구와 함께였다. 겨우 수지를 맞추고 있었는지라 이 조건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 사장은 납품을 거부하고 공장 문을 닫은 뒤 개인 파산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기껏 창업했는데 힘 한번 못 써보고 쓰러지는 게 너무 싫다”고 말했다.

○ 동반성장 온기 2, 3차엔 전달 안 돼

대기업이 추진하는 동반성장의 온기가 2차나 3차 협력업체에 전달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납품단가 후려치기의 피해를 가장 크게 보는 곳은 을(乙)이 아니라 병(丙)이나 정(丁)으로 불리는 2차 이하의 협력업체들이다.

1995년부터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하면서 공장장까지 지내고 2009년 8월 아이티모비스를 창업한 여 사장은 ‘불나방’으로 불린다. 잠도 안 자고 일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경영은 쉽지 않았다. 2010년 이미 2억 원의 손해를 보고 있었던 여 사장은 지난해 9월 1차 협력업체와의 거래를 중단하려고 했었다. 그러자 1차 협력업체는 납품단가를 올려주겠다고 했고 거래는 계속됐다. 하지만 올려준 납품단가 780원도 직원들의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수준이었다. 여 사장은 “비슷한 부품을 납품받는 외국계 업체는 약 1000원을 단가로 쳐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가 인하를 거부하고 공장 문을 닫은 뒤 공정거래위원회와 동반성장위원회에 부당거래 신고를 했지만 조사는 1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3개월 이상 어음으로 연명하는 2차 이하 협력 제조업체들은 한 달만 공장을 돌리지 못해도 엄청난 손실을 보기 때문에 이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1차 협력업체 측은 자신들은 법을 어긴 일이 없다고 말했다. 공정위와 지식경제부도 “실질적으로 1차 협력업체가 법적으로 잘못했다는 것을 밝히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 부품업계 관계자는 “아무도 잘못이 없는데 멀쩡하게 운영되던 한 업체가 문을 닫은 이 상황이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현금결제를 하고 납품단가를 협의해 조정하는 등 동반성장을 시도해도 결국 1차 협력업체의 변화가 없으면 2, 3차는 그 혜택을 보지 못하는 셈이다.

17일 대구 공정위 하도급과를 찾아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던 여 사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죽겠다고 결심하니 오히려 살 의지가 생겼습니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취직 준비합니다. 열심히 살 겁니다. 첫 월급 타면 ‘박카스’ 사가지고 올게요.”

○ 1차 협력업체가 변해야 동반성장 성공

여 사장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2차 협력업체는 1차 협력업체에 비해 모든 것이 열악하다. 산업연구원(KIET)에 따르면 자동차업계 1차 협력업체의 영업이익률은 2차 협력업체보다 높다. 2001∼2009년 1차 협력업체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6.7%이지만 2차 협력업체는 4.2% 수준이다.

1, 2차 협력업체의 영업이익률 격차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심화됐다. 김경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2005년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이슈 이후 1, 2차 간 격차가 2007년 1%포인트까지 줄었지만 금융위기가 닥치자 2차 협력업체는 대기업과 1차 협력업체의 ‘내 몫 챙기기’에 치여 쓴맛을 봐야 했다”고 말했다. 2009년 영업이익률 격차는 3.7%포인트였다.

물건값을 받는 데서도 2차는 1차보다 더 불리한 조건에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1차 협력업체에 비해 2차는 물건값을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받는 경우가 더 많고, 어음이 현금으로 전환되는 시간도 더 늦었다.

최근 대기업들은 1차 협력업체뿐만 아니라 2∼4차와의 동반성장을 추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자사의 역할인지 고민하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1차 협력업체에 2∼4차 협력업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경영 간섭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LG전자는 “2차 협력업체를 지원할 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평가 기준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대구=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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