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선진국’ 영국 가보니… 내년부터 모든 근로자 ‘퇴직연금 자동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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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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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퇴직연금은 ‘양극화’… 저소득층엔 ‘남의 떡’

《 영국 클레버던이 고향인 리처드 윌리엄스 씨(29)는 런던에 살며 임시직으로 영어강사와 시나리오 작업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수입이 많지 않은 데다 잦은 이직으로 퇴직연금은 가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년부터 일정 소득 이상의 모든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자동 가입되는 새 제도가 시행되면 그도 퇴직연금 수급자가 된다. 윌리엄스 씨는 “자발적으로 가입하기가 번거로웠지만 앞으론 모든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연금보험료 일부를 지원해주고 세금공제도 된다고 하니 이 기회에 퇴직연금에 가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연금 선진국’ 영국은 요즘 연금개혁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런던의 금융지구 카나리워프에 있는 금융감독청(FSA) 투자정책부의 밀턴 카트라이트 씨는 “고령화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2008년부터 공적연금 비중을 줄이고, ‘퇴직연금 자동 가입’을 골자로 하는 개혁을 추진해 내년 전면 시행을 앞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영국의 퇴직연금 가입비율은 2009년 말 현재 37%에 이른다. 한국의 퇴직연금 가입비율은 4월 말 기준 30%대로 영국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퇴직연금 관련 제도는 양적팽창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잦은 이직과 비정규직 증가로 저소득계층이 퇴직연금의 사각지대에 있으며, 사적연금 필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은퇴 후 받는 연금액수와 현역 시절 소득을 비교한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52.6%에 불과하다. 영국은 이 비율이 70%에 이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대 80%를 권고하고 있다. 퇴직연금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선진국들과 달리 초기제도 보완책을 담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국회에서 3년째 계류 중이다.

안정적 노후재원 마련을 위해 2005년 도입된 한국의 퇴직연금제도는 매년 100% 넘게 덩치를 키워 적립금을 32조 원까지 불렸다. 특히 기존 퇴직보험 및 신탁제도에 대한 법인세 감면 혜택이 종료된 올해부터 상당수 대기업이 세제 혜택을 계속받기 위해 퇴직연금제로 돌아서고 있다. 하지만 가입자들은 일부 대기업 근로자에게 한정돼 있어 정작 노후재원 마련이 시급한 저소득 계층은 소외되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4월 말 기준 500인 이상 사업장의 57%가 퇴직연금에 가입했지만 10인 미만 사업장 가입률은 4.6%에 그쳤다. 지난해 12월부터 퇴직연금 제도가 적용된 4인 이하 사업장 가입률은 3.3%로 훨씬 미미하다. 문제는 이 같은 중소규모 사업장의 저소득 계층이 전체 근로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4인 이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가 전체의 30%를 넘고 사업장 비율로는 약 65%를 차지한다.

영국은 퇴직연금 공백지대를 없애기 위해 내년부터 근로자 1인 이상의 모든 사업장을 퇴직연금에 자동 가입하게 한다. 연간 5035파운드(약 890만 원) 이상 소득을 얻는 22∼65세(여성은 22∼60세)의 모든 근로자가 대상으로, 금융지식이 낮은 저소득층을 위해 0.5%포인트 낮은 수수료와 보수적 투자가 특징인 공적연금사업자 ‘네스트(NEST)’도 새로 만들었다. 이 제도로 500만∼900만 명의 신규 가입자가 생길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근로자가 원하면 가입 이후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지만 영국 노동연금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근로자 65%가 “자동 가입 후 퇴직연금을 유지하겠다”고 응답했다.

사적연금제도를 활용한 노후 대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도 문제다. 한국은 2000년에 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고, 15년 뒤인 2026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 사적연금 심리적 저항 없앨 제도적 장치 필요 ▼

하지만 국내 사적연금의 노후소득 보장수준은 국제기구가 권고하는 40∼50%에 훨씬 못 미치는 17.6%이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적연금 자산비중도 11.9%에 불과하다. 아누 우파드햐 FSA 개인저축계좌(ISA) 담당자는 “많은 근로자가 당장의 부담으로 사적연금 가입과 은퇴 대비 저축에 주저하기 마련”이라며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심리적 저항을 없애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국은 노후 대비 재정 설계의 필요성과 사적연금 활용의 중요성을 어릴 때부터 인식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구축 중이다. 대표적으로 ‘어린이 펀드’ 제도를 도입해 어릴 때부터 효과적인 개인 재무관리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의무가입이지만 정부가 대상자 전원에게 50∼250파운드를 지원하고 세제혜택도 준다. 이 상품은 올해 말부터 정부 지원금을 폐지하고 투자자들이 선택적으로 가입할 수 있는 비과세 저축·투자계좌 ‘주니어 개인저축(ISA)’ 형태로 전환된다. 한재영 금융투자협회 증권국제부 과장은 “장기간에 걸친 퇴직연금 개혁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어릴 때부터 철저한 교육으로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연금 선진국들처럼 국내 퇴직연금도 국가차원의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런던=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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