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과학 2.0]처치 곤란한 고래, 폭파시켰더니…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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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오리건 주 플로렌스. 북태평양 인근의 작은 마을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들이 에워싼 것은 다름 아닌 고래. 조류에 휩쓸려 해변까지 떠밀려온 고래는 14m 길이로 무게는 8t이 넘었다. 주민들은 고래 처분을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해결책이 나왔다. 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되는 다이너마이트로 고래를 폭파해 산산조각을 내자는 아이디어였다. 폭발된 고래가 잘게 나눠져 해변에 떨어져도 갈매기들이 조각들을 죄다 먹게 될 것이므로 따로 치울 필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민들은 일제히 동의했고 고래 대폭파 작전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
다량의 건설용 다이너마이트가 매립됐다. 폭발음이 들리자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이 환호는 얼마 뒤 비명으로 변했다. ‘잘게’ 조각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고래는 ‘거대한’ 토막으로 갈라졌다. 폭발로 인해 하늘 높이 치솟은 고래 조각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하늘에서 떨어졌고, 심지어 주변 자동차들을 박살내기까지 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폭파 현장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 고래 폭파 일화는 1970년에 벌어진 실화다. 아쉽게도 본질은 파악하지 않고 표면적인 관찰이나 수박 겉핥기식 학습으로 시간과 인력을 낭비하는 사례는 플로렌스 해변뿐 아니라 경영 현장 곳곳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DBR 75호(2월 15일 발생)가 직관에 따른 오류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소개했다.

○ HP의 이클립스 프로젝트

1996년 HP는 ‘이클립스(Eclipse)’라는 신규 라인을 건설해 잉크젯 프린터를 새로 출시하기로 했다. 로봇이 모든 조립 공정을 맡는 자동화 시설로 생산 재고가 거의 없는 린(Lean) 생산방식이 이클립스 라인에 도입됐다. 하지만 정작 이클립스 라인이 가동되자 경악할 만한 사태가 벌어졌다. 생산 물량이 목표치의 절반도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몇 주가 지나도록 원인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HP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생산시스템을 연구하는 스탠리 거슈윈 교수에게 자문했다. 거슈윈 교수는 공장 데이터를 취합해 문제의 근본 원인이 린 경영을 통한 무리한 생산재고 저하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이 문제가 자동화 시스템과 잦은 기계 고장 문제와 함께 증폭됐다는 점도 발견했다. 마치 작은 화학 물질이 각각 반응하면 큰 반응을 일으키지 않지만 서로 함께 반응하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는 것과 같았다.

○ ‘재고=악’의 허와 실

직관적으로만 생각하면 공장 전체의 생산율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공장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의 생산율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거슈윈 교수는 공정과 공정, 혹은 기계와 기계 사이의 버퍼(buffer·완충)에 있는 생산 재고와 생산율 간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기계 고장이 전혀 없다면 생산율에 영향을 미치는 건 기계의 생산율이라는 직관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현실에선 기계가 언제든 고장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공장 생산율과 총버퍼의 관계를 분석해 보면, 버퍼가 전혀 없을 때 총생산율이 가장 낮고, 일정 부분까지는 버퍼가 늘어나면서 생산율이 증가한다. 특정 공정에서 예상치 못한 고장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어느 정도 생산 재고를 쌓아놓아야만 이미 비축해 놓은 재고로 탄력적인 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HP가 이클립스 라인을 도입하며 목표로 했던 생산율은 충분한 재고량, 즉 버퍼 공간이 있을 때 가능한 수치였다. 그런데 HP는 생산재고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고 충분한 버퍼 공간을 두지 않았다. 실제 생산율이 목표보다 훨씬 낮았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HP는 목표 생산치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버퍼 공간을 계산해 이를 각 기계 사이에 설치했다. 이를 통해 목표치를 달성하면서도 재고량을 최대한 낮춰 뒤늦게나마 린 경영의 본질을 살릴 수 있었다.

○ 경영에서 과학이 필요한 이유

HP가 처음에 맹목적으로 린 생산 방식을 도입한 이유는 당시 ‘도요타 생산 방식’이나 ‘린 경영’이 유행처럼 번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유수의 언론은 재고 없이 생산라인을 운영하는 도요타자동차의 사례를 몰락하는 미국 제조업의 구세주로 치켜세웠다. 이 과정에서 왜 생산 재고가 군더더기인지는 논리적으로 따져보지 않았다. ‘생산 재고는 무조건 악(惡)’이라는 사고는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도요타자동차가 악으로 규정한 것은 ‘필요 이상’의 생산 재고였다. 바꿔 말하면 일정 수준의 생산 재고는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필요 이상이라는 개념을 간과했고, 그 결과 논리가 아닌 직관에 따라 판단했다.

장영재 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장영재 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플로렌스 주민들이 직관적인 판단으로 고래를 폭파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HP도 생산 재고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이를 무조건 제거하려 했다. 경영에서 과학은 직관적 사고로 판단하기 힘든 문제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탐구하고 실험하게 해서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자연 현상을 논리적으로 이해한 물리학이 탄생한 뒤 자동차나 비행기가 발명된 것처럼 본질을 이해하면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비즈니스 운영을 할 수 있다.

장영재 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yjang@kaist.edu

정리=김유영 기자 abc@donga.com


▲동영상=죽은 고래, 폭파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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