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기자의 쫄깃한 IT]디지털 먹이사슬,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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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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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옥상으로 따라와!”

“어쭈? 죽고 싶냐!”라고 대답은 하지만 50분 수업시간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던 그 시절. 속마음은 이랬을 겁니다. ‘아, 씨… 어떻게 하지? 두들겨 맞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일부터 학교는 어떻게 나오지. 쫄지 마, 쫄지 마….’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방과 후 옥상’ 등 학원물에서 옥상은 소위 학교 ‘1진’들이 애들을 신나게 두들겨 패던 장소로 그려졌죠. 둘 중 한 명이 백기(白旗)를 들기 전까지 절대 내려갈 수 없는 결투의 장소이자 싸움의 능력에 따라 ‘초식학생’부터 ‘육식학생’까지 먹이사슬이 완성된 곳이기도 했죠.

디지털시대에도 학교 옥상 위 결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댓글로 싸우다 분이 안 풀린 사람들이 직접 오프라인에서 만나 싸우는 ‘현피(현실+플레이어 킬)’가 이슈일 때만 해도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필요 없게 됐습니다. 조용히, 읊조리기만 하면 됩니다. “너 신상(정보) 털리고 싶냐?”라는 말이 디지털시대 가장 무서운 선전포고로 떠올랐으니까요. 상대의 주민등록번호, 휴대전화 번호, 계좌번호 같은 숫자로 대표되는 갖가지 개인정보는 물론이고, 인터넷 카페 활동 여부, 블로그 글, 그간 남긴 댓글 등 온라인상 과거 행적을 누가 먼저 낱낱이 들춰내 공개하는가, 그것이 곧 실력으로 통합니다. 과거 싸움이 둘만의 주먹질에 불과했다면 신상 공개는 불특정 다수가 알게 되고 “아,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낙인’까지 찍히게 돼 한 사람의 인생에 치명타를 줄 정도로 파급력이 크답니다. 누가 먼저 남의 신상을 캐는가, 이것이 신(新)디지털 먹이사슬 이론인 셈이죠.

학교처럼 매일 봐야 하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남의 신상을 털며 ‘육식 누리꾼’이 될 필요가 있을까요?

최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상을 잘 털기로 소문난 한 누리꾼 A에게 다른 누리꾼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야 그렇게 잘 털면 내 것도 털어봐”라고 말이죠. 안 그래도 A의 실력에 의문을 제기해 온 누리꾼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안 돼 A는 인터넷 게시판에 그 누리꾼에게 “○○아 너네 엄마 1966년생 아니냐?” “휴대전화 번호 이거지?” 등 갖가지 정보를 늘어놓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A는 온라인상에서 누리꾼들로부터 ‘능력자’라며 추앙받게 됩니다.

여세를 몰아 A는 1일 오후 1시부터 ‘3·1 사이버 전쟁’의 지휘까지 맡았습니다.

한일 양국의 누리꾼들이 인터넷 접속 트래픽을 급격하게 늘려 서로의 서버를 다운시키는 전쟁이었죠. 우리나라의 타깃은 한국을 비하하는 글들이 주로 올라오는 일본 커뮤니티 사이트 ‘2ch(니찬)’이었습니다. A가 주도해 시작한 사이버전쟁은 조직 구성, 홍보, 역할 분담 등 모든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휘부로서 장군인 A 밑에 공격을 맡은 일명 ‘보병’, 일본 상황을 알리는 ‘통신병’, “같이 공격하자”며 다른 누리꾼들 끌어모으고 전쟁을 홍보하는 ‘종군기자’ 등으로 역할을 나눠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끝에 일본은 항복 의사를 밝혔습니다. 현재 A는 온라인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영웅’이 됐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적어도 방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죠. 하지만 아날로그 시절 옥상 위 주먹다짐도, 디지털시대 신상 털기도, 그 선을 넘으면 범죄라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라인 속 먹이사슬 최고 위치까지 올라가기 위해 오늘도 철없는 누리꾼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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