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78>‘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9월 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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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경유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1972년 8월 1일 당시 장영신 회장의 집무 모습. 이날 장 회장은 살림만 하던 주부에서 수백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기업체 사장으로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경제계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애경유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1972년 8월 1일 당시 장영신 회장의 집무 모습. 이날 장 회장은 살림만 하던 주부에서 수백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기업체 사장으로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경제계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여성 경영인이 별로 없던 1970년대 기업 환경에서 나는 본의 아니게 ‘대단한 여성’이나 ‘여장부’로 비쳤고 남다른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 역시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온 주부에 지나지 않으며 운명의 이끌림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왔을 뿐이다. 나는 평소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3만 달러 시대로 가려면 반드시 우수한 여성 인력을 적극 활용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여성이라는 벽에 갇힌 여성이 있다면 과감히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국가경제 발전에 얼마나 큰 힘이 될 것인가. 바로 그 여성의 힘을 분출하는 기폭제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한다.》

① 연재에 들어가며
넷째 낳고 사흘뒤 ‘남편 타계’ 비보
‘애경유지’ 맡을지 1년간 심사숙고
가정주부에서 경영인으로 새 삶

“엄마 걱정 마. 이 앞에서 학생들에게 뽑기 장사 하면 되잖아!”

1970년 가을 어느 날, 나는 집 앞에서 동네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넋 놓고 앉아 보고 있었다. 당시 열 살이던 큰아들(현재 채형석 그룹 총괄부회장)이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실의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큰아들이 너무나 대견하고 고마워서 아들을 끌어안고 처음으로 울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서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게 이즈음이었던 듯하다. 큰아들은 내 친구들에게서 “저런 효자가 있으니 애경이 잘된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1970년 7월 12일.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나에게 새로운 운명이 시작된 날이다. 1954년부터 애경유지를 창업해 운영하던 남편이 사업이 한창 번창일로에 있던 와중에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막내아들을 낳은 지 사흘째 되던 그날 나는 산부인과 병원에 누워 있었다. 남편과 결혼한 지 11년, 내 나이 34세 때 일이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산모에게 알리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곧바로 알려주지 않아 나는 이 비보를 3일이나 지난 후 내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됐다. 포도주 한 병을 들고 나타난 신부님은 “너에게 인생을 새로 시작할 기회가 왔다”느니, “하느님만이 의미를 아실 뿐 지금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 등 종잡을 수 없는 말씀을 한참 했다. 잠자코 듣다 보니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였다.

하늘이 노랗다, 거짓말 같다는 말뜻을 처음 실감했다. 현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열 살부터 갓난아기까지 올망졸망한 세 아들과 딸아이 등 4명의 아이였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준 신부님은 “너는 지금 하늘이 무너진 것 같겠지만 이 일이 불행으로 끝날지 아닐지는 너 하기에 달렸다. 나쁜 일인지 좋을 일인지 지금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 되며, 아무리 절망에 빠졌다 해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반드시 살아날 길이 보이는 법이다. 너에게는 지금 슬퍼할 겨를이 없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정신을 차려라. 그러면 반드시 하느님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타이름으로 큰 힘을 주었다.

남편의 사망 이후 1년 동안 나는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깊이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회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편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놓은 회사가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아이들로 키워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주려면 내가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애경을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결혼 후 10년 동안 집안일에만 전념했던 보통의 가정주부가 세상에 막 출사표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결심이 서자 나는 아무도 몰래 낙원동의 경리학원에 나가 복식부기 등 경리를 배웠다. 돈 액수를 읽으려면 동그라미 수를 하나하나 세야만 했던 ‘아줌마’가 경영에 첫발을 딛기 시작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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