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부동자금… “회수 시기상조”

  • 입력 2009년 5월 19일 02시 55분


정부가 푼 돈 투기자금화… 자산거품 우려

회수하자니 경제회복 지연 ‘딜레마’ 빠져

■ 800조 과잉유동성 논란

단기 유동성 규모가 사상 처음 800조 원을 넘어선 것은 기업과 개인이 갑자기 자금이 필요할 때에 대비해 단기금융상품에 여윳돈을 넣어두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작심하고 푼 돈이 기업의 투자 같은 생산적인 용도로 쓰이지 않고 주식, 부동산 등 고수익 투자처를 겨냥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 대기자금과 비상용 자금 늘어

엔진부품을 만드는 A사가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당좌자산은 3월 말 현재 2486억 원. 경기가 지금보다 나았던 2006년 말보다 1500억 원가량 늘었다. 회사 측은 “은행이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는 등 예상 못한 결제 수요가 생길 것에 대비해 단기금융 비중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개인사업을 하는 B 씨는 올 2월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뒀던 300만 원을 빼서 주식에 투자해 20%가 넘는 수익을 냈다. 최근 주식을 처분해 수익을 실현한 B 씨는 이 자금을 다시 MMF에 넣었다.

단기 유동성이 급증하는 것은 위의 사례처럼 고수익을 내는 투자를 준비하거나 기업이 비상상황에 대비하려는 수요가 과거에 비해 많아졌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달 이후 공모주 청약에 몰린 46조 원과 인천 지역 새 아파트 분양에 몰린 청약증거금들이다. 이런 자금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염두에 두고 단기금융상품에 대기하고 있던 돈이다. 전민규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은 “현재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 산업자금으로 흘러가기에는 기업의 시각으로 보기에 아직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안전하고 수익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로 돈이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지난해 9월의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같은 급작스러운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단기금융상품에 넣어둔 돈이 늘어난 것도 단기 유동성이 급증한 원인이다.

당국 딜레마… “유동성 회수 시기상조”

금융 당국은 현재 단기자금 규모가 전체 금융시장을 왜곡할 만큼 과잉 유동성 상태인지를 판단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도 현 상황이 과잉 유동성이라는 쪽과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양분돼 있다. 과잉 유동성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은 최근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단기유동성 비중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아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흐르는 자금이 많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하이투자증권이 한국은행 자료를 토대로 단기자금의 범주를 따로 설정해 분석한 결과 전체 유동성 가운데 단기유동성 비중은 올 3월 말 현재 58.3%로 작년 같은 시점보다 10%포인트가량 급증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금융위기에 대처하면서 유동성을 많이 푼 것은 사실이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유동성을 회수해야 할 상황이 조만간 올 수 있다”며 “통화정책이 바뀔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시장이 놀라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 실장은 또 “정부가 재정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면서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시장 참여자들에게 주고 구조조정을 통해 불확실성을 줄여야 실물로 유동성이 흘러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단기 자금의 절대 금액만을 놓고 과잉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3년 7월 ‘단기 부동자금 급증의 실상과 해결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2002년 말 기준 부동자금이 478조 원에 이르고 이 중 139조 원이 과잉 자금”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당시 보고서를 작성했던 최희갑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2002년에 비해 지금은 기업이 예상치 못한 신용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자금을 기업 내부에 월등히 많이 쌓아둔 상황이어서 단순히 유동성이 많다고 해서 ‘과잉’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중에 풀린 자금에 대해 과잉이냐 아니냐를 판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당장 통화정책을 동원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지 않아 금융 분야의 충격이 어느 정도 될지 모르는 판국에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는 등의 유동성 회수정책을 펴면 금리가 올라 경제회복이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시장이 조금 나아졌다고 ‘과잉 유동성’ 얘기를 꺼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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