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이어 엔화 약세… 엎친 데 덮친 ‘수출 한국’

  • 입력 2009년 5월 13일 02시 54분


기업들 ‘마른수건 쥐어짜기’ 모드… 日관광객 발길도 뜸해져

11일 오후 2시경,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화장품 전문점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 쇼핑객이 매장을 발 디딜 틈 없이 채우던 곳이다. 매장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3월까지 손님의 80% 정도가 일본인이었지만 4월 들어 줄기 시작해 이달에는 일본인 손님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며 “이달 초 일본의 황금연휴 기간에 매장을 찾은 손님도 작년 이맘때보다 적은 듯하다”고 말했다.

명동 골목 사거리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일본어로 안내를 해주는 한 직원은 “3월보다 4월에 안내소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30% 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안내원과 약 10분간 대화를 하는 동안 단 2명의 일본인이 안내소를 찾았는데 모두 업무차 한국을 찾은 비즈니스맨으로 보였다.

‘포스트 엔고’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엔화 강세 덕분에 한동안 특수(特需)를 누린 국내 유통·호텔업계는 울상을 짓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가격경쟁력 약화로 반사이익을 챙겨온 전자와 자동차업계도 일본 기업들의 반격에 대비해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엔고’로 웃었지만…

그동안 이들 업계가 엔화 강세로 챙긴 이득은 상당한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북미 액정표시장치(LCD) TV시장에서 지난해 4분기 19.2%의 시장점유율로 소니(16.3%)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올해 1분기 미국에서 현대·기아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은 7.5%로 지난해 같은 기간 4.6%보다 2.9%포인트 뛰었다. 이 기간에 일본 자동차는 47만 대 이상 판매가 줄었다.

포스코도 올 들어 도요타와 소니에 잇달아 철강제품을 납품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일본의 경기침체로 대일(對日) 수출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엔화 강세 덕분에 지난해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달부터 엔화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시작된 지난해 9월 이후 계속 올라 3월 3일 100엔당 1620원을 찍은 엔화 가치는 이후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달 내내 100엔당 1300원 대를 맴돌았으며 이달 12일에는 100엔당 1268원까지 떨어졌다.

기업들은 엔화 가치 하락이 올해 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동아일보 산업부가 지난달 28일 업종별 주요 기업 21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들이 전망한 100엔당 평균 원화 가치는 1223.68원이었다. 설문에 참여한 업체 가운데 16개 회사는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답했다.

○ 떨어지는 엔화 가치에 기업들 ‘긴장’

LG전자는 올해 1분기(1∼3월) 해외법인을 포함해 매출 12조8530억 원, 영업이익 4556억 원을 올렸다. 역대 1분기 사상 최대 매출이다. 그런데도 이 회사는 유례가 드문 ‘마른수건 쥐어짜기 경영’에 돌입했다. 지난해 4분기(10∼12월) 전체 매출액의 25.0%를 차지했던 매출 등 판매관리 비용을 올해 1분기에는 17.5%로 줄였다. 비용절감운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LG전자는 판매관리 비용을 줄이는 것 외에도 구매비, 고정비 등 올해 총 3조 원의 지출을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회사는 또 본사에서 근무하던 인력 약 4000명을 태양전지, 4세대 이동통신(4G) 등 신사업에 재배치하며 체질 개선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최근 엔화로 받는 수출 대금을 원화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다 다시 수입 물품 대금 결제에 활용하는 ‘환 매칭(matching)’을 실시해 환율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현대자동차도 2만∼3만 개의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자동차산업의 특징을 살려 협력업체와 기술 제휴를 통해 생산원가를 낮추면서도 품질은 유지하는 연구개발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대기업들은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지만 문제는 환율 변화 등에 대한 체계적 준비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포스트 엔고’ 대비 시급

전문가들은 엔화가 외환시장에서 급속히 풀리고 있어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한다. 수개월 전처럼 엔고로 돌아갈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해외시장에서 ‘환율 효과’가 나타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은 지나야 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산업계의 예측이지만 유통업 등 일부 업종은 이미 엔화 가치 하락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1∼3월 명품관 패션상품의 30%는 일본인들이 사갔다”며 “하지만 4월 들어 이 비중이 20%로 줄었다”고 말했다.

또 ‘엔고 기간’에 일본 대기업들이 뼈를 깎는 사업 구조조정과 감원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지면서 ‘포스트 엔고’의 위력이 예상보다 클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현재 기업들이 구상, 시행하고 있는 많은 방법으로 엔고 이후 상황에 어느 정도 대처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기술경쟁력과 기업효율성이 함께 높아지지 않는다면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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