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저축률 1%대… 배고픈 돼지저금통

  • 입력 2009년 3월 23일 21시 18분


자영업자인 한모(44·서울 마포구) 씨가 지난달 인건비와 세금을 떼고 순수하게 벌어들인 돈은 530만 원. 각종 대출 이자, 두 딸의 학원비, 보험료, 기타 생활비 등 일상적인 지출을 빼고 나면 10만 원도 안 남는다. 한 씨는 "2006년 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 뒤는 좀처럼 돈을 모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 씨처럼 과도한 대출과 사교육비 지출 등으로 저축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한국 가계의 저축률이 사상 처음으로 1%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실물경제실장은 "지난해는 고용 사정이 나빠지고 가계 부채가 계속 늘어났고 물가와 금리 수준도 높았기 때문에 2008년 저축률이 1%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세계 최저수준으로 떨어진 저축률

가계 저축률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3.2%에 이른 뒤 해마다 급감해 2002년에는 2%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2004년 5.7%까지 저축률이 올랐으나 2007년 2.3%로 다시 추락했고 작년에도 하락세를 이어갔다.

가계저축률은 세금과 이자 등을 제외하고 개인이 쓸 수 있는 모든 소득(가처분소득) 가운데 소비지출에 쓰고 남은 돈의 비율을 말한다. 예금 적금 뿐 아니라 펀드 투자액도 저축으로 잡힌다. 가계저축률이 1%라면 월 100만 원을 벌어 소비 지출한 뒤 저축할 수 있는 여윳돈이 단돈 1만 원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2007년 기준으로도 독일(10.8%), 프랑스(12.4%), 스위스(13.0%), 스페인(10.2%) 등보다 훨씬 낮고 일본(3.1%)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2007년 4분기 0.4%까지 떨어졌던 미국 가계 저축률도 상승 반전해 올 1월에는 5%까지 높아진 것을 감안하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국은행은 27일 '2008년 국민계정'에서 저축률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한은 관계자는 "올해부터 국민소득 추산 기준년도가 2000년에서 2005년으로 바뀜에 따라 소득과 저축률이 약간 올라가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저축률 하락 추세가 바뀐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부동산 투자와 사교육 지출 급증하며 저축률 급감

한국의 가계순저축률 급감은 소득 증가폭은 줄어든 반면 부채와 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저금리로 인한 부동산 열풍과 사교육비 지출 급증은 가계의 저축여력을 크게 악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면서 가계의 금융부채 규모는 2008년 말에는 800조 원을 넘어서며 1997년 말의 3배가 넘는 규모로 늘어났다. 가계 소비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1980년대 6% 수준에서 최근 12%수준까지 크게 올랐다.

가계저축률 급감은 총저축률(정부 기업 개인 등 모든 경제 주체의 저축비율) 이 30% 이상을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것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100조 원대의 내부 유보금을 쌓는 등 현금을 쌓아왔지만 가계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저축률이 낮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저축률 하락은 그만큼 소비 지출이 늘어난 데 따른 것으로 저축을 너무 많이 하고 소비를 줄이면 내수가 침체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가계는 소득 증가에 비해 부채 부담이 너무 커 저축할 엄두를 못내고 있는 것이 문제다. 사회안전망도 선진국에 비해서는 미흡하고 급격한 노령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낮은 저축률은 자산가격 하락및 경기침체 상황과 맞물리면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을 수 있다.

이부형 실장은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때는 저축률이 낮더라도 소득이 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지만 현재처럼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서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신민영 실장은 "취약계층인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고용 안정을 최우선하고 일자리를 늘려 가계 부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윤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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