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억 달러 → 3억 달러 “억”

  • 입력 2009년 2월 9일 03시 14분


투자공사, 美IB 투자 기막힌 1년 성적표

배당금 감안해도 15억달러 날려 ‘값비싼 수업료’

“투자역량 한계”… “장기적 관점서 봐야” 반론도

한국의 국부(國富)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가 처음으로 전략적 승부수로 던진 메릴린치 투자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실을 내고 있다.

메릴린치 인수자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주가가 급락하면서 KIC의 투자 성적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난해 1월 20억 달러를 들여 미국 투자은행(IB)인 메릴린치에 대한 전략적 투자에 나선 지 1년여 만에 투자한 지분의 시가 평가액이 3억 달러대로 쪼그라든 것이다.

KIC는 지난해 1월 인수한 메릴린치 우선주가 보통주 조기 전환과 BoA와의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BoA의 주식 6209만3045주로 교환됐다고 8일 밝혔다.

BoA의 주가는 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증시에서 1990년 이후 최저치인 4.7달러까지 떨어지는 등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종가가 주당 6.13달러로 회복됐지만 KIC가 보유한 주식의 시가 평가액은 3억8063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동안 받은 배당금 등 1억4000만 달러를 합하더라도 투자 지분의 평가액이 원금의 4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정도다. 15억 달러(2조700억 원)가량이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다.

KIC 측은 메릴린치 지분 인수는 KIC가 글로벌 자산운용사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의 성격이어서 1년간의 결과로 성패를 예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꼼꼼한 투자로 정평이 난 싱가포르 정부의 투자회사인 테마섹마저 메릴린치 투자로 2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볼 정도로 세계 금융시장 상황이 정상 궤도를 벗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KIC의 시행착오 덕택에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포기할 수 있었다는 ‘순기능’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번 투자 과정에 대한 철저한 중간 점검을 통해 공과(功過)를 제대로 따져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메릴린치 투자시점 결정은 KIC 투자 역량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배드 딜(bad deal)’이었다는 평가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메릴린치 주가가 40달러대로 떨어진 시점이 바닥이라고 보고 50달러대에서 인수에 나섰는데 뒤돌아보니 오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2007년 1월 24일 주당 97.53달러까지 치솟았던 메릴린치 주가는 부실자산 규모가 불어나면서 KIC가 인수하기 직전인 지난해 1월 8일 48.17달러까지 하락했다.

지분 투자 이후 미국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파산과 금융시장의 불안이 지속되면서 메릴린치 주가는 20달러대로 추락했다. ‘글로벌 IB의 지분을 바닥에서 살 타이밍’이라는 판단이 결과적으로 오판이 된 것이다.

그나마 2010년 10월 주당 52.4∼61.3달러에 보통주로 전환하는 조건으로 우선주를 인수한 KIC가 계약 당시 삽입한 ‘가격 재조정 조항’을 근거로 지난해 7월 재협상을 벌여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을 1차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이 결과 14억 달러로 줄어든 평가액을 20억 달러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배당을 받을 수 있는 우선주를 보통주로 조기 전환하면서 메릴린치 주가 하락의 리스크를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다행히 BoA가 파산위기에 몰린 메릴린치의 주식 1주를 자사주 0.8595주로 바꾸는 합병을 발표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피하게 됐지만 메릴린치의 부실을 떠안은 ‘구원투수’ BoA의 주가 역시 30달러 후반대에서 4달러대로 추락해 KIC의 손실도 커졌다.

전문가들은 KIC가 주식과 채권 등 포트폴리오 투자에서도 지난해 마이너스 수익률을 냈을 것으로 보고 국부펀드의 투자 전략과 역량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중국투자공사(CIC)와 중동 국부펀드들은 해외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지고 외국 자본의 이탈이 빨라지자 유가 급등과 수출 증가로 쌓은 막대한 외환보유액의 투자처를 해외에서 국내로 돌리고 있다. 정부 당국은 KIC가 국내 원화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세계 금융시장의 충격으로 모든 국부펀드와 금융기관이 손실을 봤고 KIC의 첫 도전이라는 점을 볼 때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한다”면서도 “내실을 다지기 위해 투자의사 결정과 위험관리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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