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문제는 리스크… 순혈주의 조직, 위기에 약해”

  • 입력 2009년 1월 5일 20시 29분


10년 전인 1999년 1월2일 한국장기신용은행이 간판을 내렸다. 1967년 민간 개발금융회사인 한국개발금융회사(KDFC)로 시작한 장은이 외환위기의 거센 파고를 넘지 못하고 국민은행과 공식 합병된 것.

그 후 10년. 1000여 명이 넘던 장은 직원들 중에 최인규 부행장 등 210여 명이 여전히 KB국민은행에서 활약 중이다. 나머지 800여 명은 '한국 금융계의 유태인'으로 불리며 금융권과 각계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연말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 외환위기 직후 은행을 떠난 다섯 명의 '장은 사람들'이 모여 한해를 마무리했다. 이날 박현수(42)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홍은미(46) 한화증권 강남금융센터장(상무), 유창우(47) 양영디지털고 교사, 이원기(47) 법무법인 유일 변호사, 김종현(50) 누리솔루션 대표가 참석했다.

●"아프지만 소중했던 외환위기의 추억"

최근 은행권의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자 참석자들은 10년 전 홀로서기에 나섰던 아픈 기억을 털어놓았다. 하루 아침에 퇴출이 결정된 다른 은행의 직원보다 명퇴금이라도 받아 사정은 나았지만 은행 밖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은행을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됐거나 미국에서 새 삶을 찾기 위해 닭 가공 공장에 취업한 동료의 안타까운 사연도 흘러 나왔다.

박 수석연구원은 "주택대출금 등을 빼고 학비와 생활비를 쓰고 나니 명퇴금이 바닥났다"며 "아이들 아이스크림조차 사주지 못했다는 아내의 얘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변호사는 "은행을 나와 사시 공부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 명퇴금을 반납할테니 은행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해볼까도 생각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10년 만에 다시 경제위기에 직면한 금융권에 대한 쓴 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외환위기 때나 지금이나 은행의 리스크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은행권이 덩치 경쟁을 하며 은행채 등 시장성 수신에 의존하다보니 금융위기에 취약해졌다고 봅니다. 시스템은 개선됐지만 이를 운용하는 사람이 역시 문제라고 봅니다."(박 수석연구원)

유 교사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감독을 강화하고 은행들이 앞 다퉈 위기관리팀을 만들었다는 데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를 모르겠다"고 술잔을 들었다.

●"위기 속에도 희망이 있다"

"외환위기 때 동료들을 떠나 보내며 속으로 울었어. 2000년 장은 출신 동료들과 창업을 하면서 내 손으로 직원들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김종현 대표)

최근 김 대표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신입사원을 뽑았다. 직원들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을 때 신입사원 공채를 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 그는 은행 전산부에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창업에 나서 여신종합시스템(CMS), 금융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 등을 개발하고 연 매출 200억 원 이상의 회사로 키웠다.

김 대표도 "평생 직장을 찾기보다 원하는 일을 찾아하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외환위기를 겪으며 배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해요. 경제 위기로 '돈이 최고'라는 인식이 더 굳어질까봐 걱정입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유 교사는 은행을 나온 뒤 고려대 사대에 편입해 '늦깎이 수학교사'가 됐다. 그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때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적자생존'의 문화를 극복하고 어려운 때 일수록 주위에서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먼저 돌아보는 '상생의 문화'가 퍼져 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리스크에 둔감하면 위기가 온다"

잘 나가던 장은이 간판을 내린 이유는 뭘까. 일부 참석자는 정치적 결정을 꼽았다. 다른 참석자는 은행 내부의 문제를 지적했다.

유 교사는 "최고의 인재가 모였다는 자부심이 순혈주의로 흘렀고 급변하는 경제 상황에 둔감하고 위기 극복 능력이 떨어지는 조직문화와 리더십을 낳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는 '우리만 낙후돼 당했다'며 주눅이 들었지만 지금은 앞서가던 미국도 엉망이 됐어요. 배울 것은 배우고 반성할 것은 고쳐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홍 상무)

1985년 장은 창구 직원으로 시작해 20년 이상 일선 영업 현장을 뛰고 있는 홍 상무는 "외환위기 당시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면서도 "자본시장통합법 등 금융시장이 본격 개방되기 전에 위기를 맞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박용기자 parky@donga.com

류원식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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