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에 번지는 인터넷메신저 악성루머

  • 입력 2008년 9월 10일 19시 44분


'미확인. 동양생명 증자 예정'

이달 2일 국내 한 증권사의 애널리스트 A(36)씨는 인터넷 메신저로 이러한 내용의 쪽지를 받았다.

이날 이 쪽지를 받은 사람은 A씨 뿐이 아니었다. 메신저에 등록된 상대방 전체에게 쪽지를 보내는 '단체쪽지 발송' 기능을 통해 이 쪽지는 순식간에 증권가로 퍼졌다.

동양생명은 긴급히 보도자료를 내고 "유상증자 계획이 없으며 기업공개(IPO) 일정에 차질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장에서 '동양생명 상장이 늦어지는 것 아니냐' '자금 흐름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형성돼 이날 동양종금증권 주가가 13% 넘게 떨어지는 등 그룹 계열사의 주가가 일제히 급락했다.

A 씨는 "기업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설(說)이 담긴 쪽지들은 맨 앞에 '미확인' '(다른 이한테) 받은 것임' 등의 수식어가 붙어 출처를 전혀 알 수 없지만, 시장에 불안심리를 조성해 주가의 등락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메신저 통해 루머 일파만파 퍼져

최근 시장에 퍼진 일부 대기업의 '유동성 위기설', '실적 악화설' 등 각종 악성 루머들의 주된 유통 수단은 인터넷 메신저다.

인터넷 메신저는 이처럼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에 주가하락으로 이익을 챙기는 공매도 세력의 작전 수단에 이용되기도 한다.

지난달에는 증권가의 한 메신저를 통해 '홍콩의 외국인들이 D사, H사, 건설주 등의 대차물량을 많이 구하러 다닌다'는 쪽지가 돌았고 해당 종목들은 주가가 폭락했다. 증권가에서는 이 쪽지가 해당 회사를 공매도 해놓고 주가하락을 기다리는 세력이 유포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쪽지 내용은 상세한 배경설명도 없이 매우 간단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OO기업 위기설'라는 짧은 문구만 돌아다니거나 'OO 주식을 갖고 있으면 지금 팔라'는 내용이 전부다. 최근에는 'OO회사의 영업이익이 O%까지 떨어졌다'는 식의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되기도 하지만 역시 별다른 근거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위기설을 겪은 한 대기업의 홍보담당자는 "메신저로 공격을 받고 나면 정작 당사자에겐 해명의 기회조차 없다"고 말했다.

주식영업 담당자와 애널리스트 등 증권가 직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메신저는 삼성FN, 미쓰리, 야후 메신저와 같이 단체쪽지를 보내는 기능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증권가 직원 한 명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대화상대로 등록해놓기 때문에, 메신저 몇 단계만 거치면 소문이 증권가 전체로 퍼지게 된다.

국내 중소형 증권사 지점의 임 모(39) 차장은 "증권사 직원들이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된 루머를 고객 및 지인들에게 알리고, 이들이 인터넷 주식투자 사이트에 올리면서 주가가 요동친다"고 설명했다.

유진그룹의 유진투자증권 매각 검토설도 언론에는 10일에야 보도됐지만 증권가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메신저를 통해 돌던 소문이었다.

우리투자증권 지점의 장경태 차장은 "증시가 안 좋을수록 루머성 쪽지가 많이 돌고, 투자자들이 이런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메신저가 루머를 퍼뜨려 주가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과정이라고도 말한다.

유진투자증권 정용택 연구원은 "주가가 먼저 떨어지고 난 뒤 시장에서 왜 주가가 떨어졌는지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가 하락 원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추측들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직군 따라 메신저 용도 달라

그러나 이런 부작용 때문에 메신저 사용을 규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업무에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 잡았기 때문.

주식과 관련된 증권가 직원들은 메신저를 '정보 교류'를 위해 사용하고 채권 담당자들은 실질적인 '매매'를 위해 메신저를 쓴다. 채권 매매는 거의 대부분 메신저로 이뤄지기 때문에 업계 종사자들은 보통 컴퓨터 두 대를 갖다 놓고 한 대는 메신저 전용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1990년대만 해도 채권 브로커와 채권운용 매니저 간의 매매 체결은 전부 '전화'로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한 건의 채권 매매를 위해 전화 10통을 넘게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증권가에서는 1990년대 후반 유명한 채권 매니저가 "앞으로 거래 편의를 위해 야후 메신저를 쓰겠다"고 선언하면서 채권 담당자들 사이에 야후 메신저가 빠르게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투신운용의 이희진 채권운용팀장은 "보통 한 화면에 40~50개의 메신저가 동시에 뜬다"고 말했다.

이지연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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