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업그레이드 경기 농업]<上>경기미의 화려한 변신

  • 입력 2007년 10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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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한국 농업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가 크다. 주곡인 쌀은 물론이고 축산물, 과일 등에서도 시장 잠식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불안과 우려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살아 있다. 경기도는 지방자치단체와 농민이 힘을 합해 ‘명품 농산물’을 생산해 우려를 희망으로 바꿔 가고 있다. 빠른 속도로 선진화되고 있는 경기 지역 농업현장을 매주 한 차례씩 살펴봄으로써 우리 농업의 미래를 진단해 본다.》

16일 오후 2시경 경기 성남시 분당구 지하철 정자역 근처의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점심시간을 넘겼지만 20, 30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주문대 아래 진열장에는 머핀, 치즈케이크와 함께 빨간색과 초록색 떡이 놓여 있다. 경기미(米)로 만든 딸기편과 쑥편이다. 이 점포의 바리스타(커피전문가) 김영란(26·여) 씨는 “지금은 빵이나 케이크보다 판매량이 적지만 손님들의 반응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 경기미와 스타벅스의 만남

지난 10년간 국내 쌀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1996년 104.9kg이던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06년 현재 78.8kg으로 뚝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체결된 한미 FTA는 농민들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밥맛 좋기로 이름난 경기미를 생산하는 경기 지역 농가들도 마찬가지.

경기미와 세계적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만남은 이런 위기감에서 시작됐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올해 초 경기미 판매 확대를 위해 떡 산업 활성화를 제안해 스타벅스와 손을 잡았다.

4월 초순 서울 무교동점 등 3개 스타벅스 매장에서 시범 판매가 시작됐다. 많은 사람이 ‘떡과 커피의 만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은 사람이 많이 가는 커피전문점에서 누가 떡을 먹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점포당 1일 판매량이 빵 판매량에 육박하는 100여 개나 됐다. 스타벅스는 이달 12일부터 경기미 떡 판매를 수도권 50개 매장으로 늘렸다.

○ 좋은 쌀로 만드는 좋은 떡이 경쟁력

스타벅스에 공급되는 떡은 경기 안성시 원곡면의 안성떡방㈜이 생산한다. 이 회사는 올여름 스타벅스 미국 본사와 경기도 평가단으로부터 3차례에 걸쳐 까다로운 실사를 받았다. 평가 점수는 만점에 가까운 97점.

높은 점수의 비결은 안성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쌀로만 떡을 만드는 것이었다.

길해용(48) 사장은 “빵보다 떡이 좋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쌀을 써야 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친환경, 참살이 바람을 타고 2년 연속 100억 원 안팎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워낙 비싼 재료비 때문에 아직까지는 적자를 내고 있다.

길 사장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면서 “당장은 쉽지 않아도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어 전망은 밝다”고 말했다.

○ 치열한 경쟁… 新경기미 시대 열어

경기미 하면 많은 사람이 이천쌀, 여주쌀을 떠올린다.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진상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이천, 여주쌀을 벤치마킹한 경기도내 다른 지자체와 농민들에 의해 다양한 고품질 경기미가 생산되고 있다.

평택 안중농협 등 4개 농협이 생산하는 ‘슈퍼오닝 쌀’은 올 6월 1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처음 수출됐다. 광복 이후 처음 이뤄진 한국 쌀의 수출이다.

가격도 kg당 2800원으로 300원 대인 베트남산이나 500∼600원대의 미국, 중국산에 비해 5∼9배 수준이다. 슈퍼오닝 쌀은 2006년 전국 농협 176개 미곡종합처리장(RPC) 쌀 품질 평가회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끝없는 품질 개선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포천에서 생산되는 ‘해솔촌 경기온천쌀’은 최근 쌀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인도네시아로 수출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포천쌀은 경기미로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농민들의 노력과 지자체의 예산 투입으로 품질 개선이라는 결실을 본 것이다.

더 나아가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으로부터 199가지의 품질, 위생, 잔류농약 검사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는 ‘199GRICE’ 인증을 얻기 위해 예산 2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이 밖에 청와대의 올해 추석 선물로 선정된 ‘김포금쌀’,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안성마춤쌀’, 오리와 우렁이를 이용해 생산한 ‘물 맑은 양평쌀’ 등도 새로운 경기미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농약 대신 키토산 비료 쓴 웰빙쌀

“두배 비싸도 없어 못 팔 지경”

경기 고양시 농협 하나로마트에 가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쌀을 살 수 있다.

이 쌀의 이름은 ‘청심(靑心)’. 겉면에 아기의 돌 사진이 인쇄돼 있어 ‘아기사진 쌀’로도 알려져 있다.

청심은 고양시 덕양농산이 생산하는 유기농 쌀이다.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병충해 예방을 위해 게, 조개껍데기에서 추출한 키토산을 쓴다.

청심의 판매가는 10kg짜리가 3만9950원.

20kg짜리가 보통 4만 원 정도인 다른 지방 쌀의 갑절 수준이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쌀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대로 같은 경기미와 비교해도 1만 원 이상 비싸다.

1994년부터 유기농 쌀 생산에 매달려 온 이원일(65) 덕양농산 대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젠 평범한 쌀로는 승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유기농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유기농 쌀을 개발했지만 유통망 확보는 쉽지 않았다.

각종 전시회, 엑스포 등 농산물 행사장마다 쌀을 들고 다녔지만 굳게 닫힌 판로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 대표는 고민 끝에 1997년 가을 소비자 700여 명을 농장으로 초청해 직접 밥을 지어 시식회를 열었다.

이 대표는 “밥맛을 보고 난 뒤에야 소비자들이 쌀의 품질을 인정했고, 이 사람들은 이후 청심의 핵심 고객이 됐다”고 말했다.

청심의 명성은 해외에도 전해졌다.

지난해 말 스위스 교포들의 요청을 받은 바이어가 덕양농산에 쌀 수출 의향을 물어 왔다.

당시만 해도 주곡(主穀)인 쌀은 수출이 불가능했다. 이 대표는 부지런히 농림부, 농협, 경기도 등 관계 기관을 찾아다녔고 올 5월 드디어 수출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이어가 다른 쌀의 판매가격과 비교하며 가격을 깎아 달라고 요구했다. 이 대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수출 계획을 취소했다. 하지만 자신감은 더 커졌다.

이 대표는 “좋은 쌀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제값을 받고 수출할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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