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지내는 사장님… 와인 배우는 직원들

  • 입력 2006년 11월 25일 02시 55분


코멘트
르노삼성자동차 장마리 위르티제 사장은 최근 임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했다. 메뉴는 스테이크였으며 와인을 반주로 곁들였다.

2000년 르노가 경영을 맡은 뒤에 이 회사 경영진의 회식 장소는 거의 양식당이다. 일부 임원은 프랑스인 사장에게 좋은 와인을 권하기 위해 와인 공부도 했다.

에쓰오일의 한 임원은 지난달 초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사미르 에이 투바이엡 대표에게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이 임원은 투바이엡 대표가 속이 불편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른 임원에게서 이슬람교도들은 금식기도 기간인 라마단 중에는 해가 지기 전까지 금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당시는 라마단 기간이었다.

○ 외국인 CEO가 바꾸는 기업문화

외국인 최고경영자(CEO)가 늘어나면서 한국의 기업문화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외국인 CEO들의 국적이 미국 유럽 중동 중국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기업문화도 다국적화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05년 기준 매출액 100대 기업 순위에 따르면 외국인 CEO(공동대표 포함)가 있는 기업은 13개. 2002년 6개사와 비교하면 3년 만에 2.16배로 늘었다. 기업분석 전문가들은 2015년경에는 30개사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윤언철 연구원은 “외국인 소유 기업이 증가하고 국내 기업에 외국인 전문경영인까지 영입되고 있어 외국인 경영자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이 경영을 맡은 기업들은 과거 상명하복 조직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팀 조직으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인간관계와 로비가 통하던 분위기도 줄어들고 시스템 경영이 확산되는 추세다.

GM대우자동차 김종도 상무는 “외국인 CEO는 직급에 상관없이 대부분 e메일로 의사소통을 해 의사결정 속도가 빠르고 현실 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한다”고 말했다.

SC제일은행은 최근 노사 합의에 의해 매주 수요일에는 직원들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아예 정시 퇴근을 명시해 놓았다. 직원들은 할 일이 남아 있어도 무조건 퇴근해야 한다.

2차, 3차로 이어지는 회식문화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와인 바 같은 곳에서 가볍게 와인 한잔을 하며 대화하는 외국형 음주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있다.

물론 한국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외국인 CEO도 많다.

위르티제 사장은 매주 2시간씩 한국어를 공부하고, 폭탄주까지 배웠다. 판문점을 방문해 한국의 분단 현실도 체험했다. 지난달 부산공장에서는 갓과 두루마기를 걸치고 원활한 생산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 외국인들의 한국 취업도 늘어

외국인 CEO시대가 오면서 외국인 인재들의 국내 기업 진출도 늘고 있다.

온라인 리크루팅업체인 잡코리아가 최근 종업원 수 100명 이상인 국내 기업 217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27.2%가 올해 외국인 직원을 뽑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은 절반이 넘는 58.5%가 외국인 인재를 채용했다. 가뜩이나 취직하기 어려운 한국 취업 준비생들은 외국인 인재들과 경쟁하며 외국인 CEO와 면접해야 하는 상황이 늘고 있다.

국내 기업에 일반 사원뿐만 아니라 임원들까지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LG전자는 내년에 최초로 외국인 임원(영입 제외)이 탄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77개 해외 법인의 외국인 핵심인재 50여 명이 임원 승진 후보로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 부담도 적지 않다

외국계 기업인 A사 임원들은 ‘수요일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외국인 사장이 영어로 주재하는 회의가 5시간 이상 진행되기 때문이다.

한 임원은 “상당수 임원이 새벽에 학원을 다니고 개인강사를 두기도 한다”며 “주말에 골프도 치지 않고 발표할 모든 내용을 한글로 적은 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영어로 외우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고 털어놓았다.

외국인이어서 한국의 국익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국인 CEO를 모시고 있는 한 임원은 “외국인 CEO는 업무처리가 합리적이고 신속해 배울 점이 많다”면서도 “한국의 국익과 회사의 이익이 충돌할 때 너무 쉽게 한국의 국익을 무시하기도 해 안타까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적이나 이념과 관련된 예민한 문제에 대해선 말조심해야 하는 것이 필수다.

미국인 CEO 앞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라크 문제를, 중국인 CEO에겐 동북공정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게 불문율로 꼽힌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