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믿은 내가 바보… 내집마련 평생 글렀다”

  • 입력 2006년 11월 1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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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물은 없고 전월세뿐 치솟는 집값이 서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9일 인천 검단신도시 예정지 주변의 한 부동산중개업소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호가 때문인지 매매 시세표를 떼어 버렸다. 전월세 물량 외에 매물 시세는 백지가 대신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매물은 없고 전월세뿐 치솟는 집값이 서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9일 인천 검단신도시 예정지 주변의 한 부동산중개업소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호가 때문인지 매매 시세표를 떼어 버렸다. 전월세 물량 외에 매물 시세는 백지가 대신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오빠 나 어떻게 해야 해….”

부동산업체에 근무하는 A 씨는 최근 울산에 사는 여동생(39)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하루 종일 가슴이 미어졌다.

전세금 5000만 원짜리 소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울먹이며 “전세금은 올려 달라고 하지, 아무리 저금을 해도 집값은 따라잡을 수 없지, 평생 집을 마련하지 못 하겠다”고 하소연한 것.

부동산 전문가를 자처하는 A 씨였지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애꿎은 담배만 피웠다.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 무주택자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었고 늦기 전에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가운데 일부 아파트단지에서는 집값을 올리기 위해 공공연히 담합을 하고 있다.

○ 아파트에 울고 웃는 세상

회사원 이모(39) 씨는 최근 처가에 잔뜩 공을 들이고 있다. 사연이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 H아파트 전세 계약이 내년 2월로 만료되는데 최근 전세금이 7000만∼8000만 원이나 뛰어올랐다.

오른 전세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데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영 내 집을 마련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처가살이를 감수하면서 전세금 1억1000만 원을 빼 아파트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씨는 “그동안 몇 차례 집을 살까 고민도 했지만 정부가 계속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쏟아내기에 기다려 왔다”며 “정부를 믿었던 내가 바보”라고 한탄했다.

속이 타들어 가기는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경제부처에 근무하고 있는 행정고시 출신 사무관 김모(37) 씨는 요즘 고시 동기들을 만나면 집값 얘기만 한다고 털어놨다.

김 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의 1억 원짜리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집값 얘기만 나오면 갑갑하다”며 “고시 출신 공무원인 내가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나마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은 최근의 집값 상승세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이모(39·여·서울 마포구 도화1동) 씨는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32평형 아파트를 8억9500만 원에 매매 계약했다.

평소 이 씨에게 전화 마케팅을 했던 한 부동산중개업소가 더 기다리면 영영 강남으로 갈 수 없다고 권유한 게 결정적이었다.

이 씨는 “너무 비싸게 산 것은 아닌지 불안했지만 이틀 뒤 같은 아파트, 같은 평형이 10억 원에 계약되는 걸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달아오르는 아파트 구입 열기

부동산 정보업체인 닥터아파트의 인터넷 문의는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250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00건이나 늘었다.

이 회사 이영호 팀장은 “8월 전세대란이 시작된 후 수요자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지금 집을 사야 되는지 아니면 전세를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의가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부동산 재테크 관련 서적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올해 10월까지 나온 부동산 관련 서적은 9000종으로 지난해 전체 7000종보다 많다. 10월 판매량도 지난해에 비해 30% 늘었다.

이 가운데는 9일 현재 10만3000부나 팔린 책도 있다. 부동산 재테크 관련 서적은 기껏해야 3만 부 팔리는 게 고작이었던 것에 비해 이례적인 현상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교통회관에서 부동산정보업체인 스피드뱅크 주최로 열린 ‘하반기 부동산시장 전망’ 설명회에는 5만5000원이나 되는 참가비를 내고도 500여 명이 몰렸다.

○ 집값 올리기 담합도 여전히 기승

올해 5월 입주한 서울 영등포구 신도림동 S아파트의 입주민 인터넷 사이트에는 ‘가치상승 프로젝트’라는 글이 올라있다.

이 글은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통제 방법을 소개하면서 ‘매물 다량 보유’ 등의 안내문을 게재한 부동산업소에 대해서는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가 나서서 이용을 막자고 촉구하고 있다.

서울 뉴타운 사업지에 이미 입주한 아파트들은 잇달아 외벽에 ‘○○뉴타운’이라는 문구를 새로 칠하고 있다. 강북구 미아동 S아파트는 최근 입주자 대표 회의를 열고 아파트 외벽에 ‘미아뉴타운’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이 아파트 주민 강모(55) 씨는 “바로 옆 성북구 길음동 D아파트는 최근 아파트 외벽에 ‘길음뉴타운’이라고 칠한 뒤 아파트 값이 더 올랐다”며 “아파트 이름을 바꾸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어쩌다 이지경까지…

‘공급확대’ 귀막은 정부, 시장 신뢰 상실

불쑥 대책 남발… 불붙은 집값 기름 부어

수도권 집값이 동시다발적으로 급등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정부는 집값 급등을 ‘투기세력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강변하다가 9일에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언론과 전문가들의 지적을 수긍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집값 급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주택 공급 부족이 꼽힌다. 정부는 지난해 8·31 부동산 종합대책에서 향후 5년간(2006∼2010년) 수도권에 매년 30만 채의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실적은 2005년 19만8000채, 올해도 9월 말 현재 9만5192채 건설에 그치고 있다.

김우진 주거환경연구원장은 “집값 급등은 투기세력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실망한 실수요자들에 의해 촉발됐다”며 “정부가 수요 억제뿐 아니라 주택 공급을 확대했더라면 집값은 진작 잡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택 공급 부족은 올가을 전세난을 불렀고 전세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돈을 보태 집을 사들였다.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 서울 은평뉴타운 등의 고분양가 논란과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신도시 발언은 집값 불안을 더 부추겼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전세난과 은행권의 주택담보 위주 대출, 일부 신도시 지역의 고분양가 논란을 집값 급등의 원인으로 꼽고 주택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수요자를 만족시킬 만한 택지를 마련하기 힘든 ‘공급의 딜레마’를 겪고 있다.

부동산114 김희선 전무는 “수도권의 상당 부분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데다 도심에서 20∼30km 떨어진 좋은 입지는 대부분 개발이 됐다”면서 “과거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 개발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됐던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시중의 과잉 유동성 문제도 지적됐다. 홍익대 전성인(경제학) 교수는 “2001년 이후 저금리 통화정책 때문에 집값이 올랐다”면서 “금리 인상 대신 대출 규제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담보가 되는 집값 자체가 워낙 큰 폭으로 오른 데다 집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정서 때문에 대출 규제책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정부 정책이 신뢰를 잃은 것도 빠질 수 없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재룡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자주 급조된 정책을 내놓는 인상을 주면서 국민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꼬집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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