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장님 일정은 묻지 마세요”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미국 체류가 장기화되면서 일절 함구하고 있다.
그 대신 계열사 사장들의 사회봉사 활동상을 전달하는 홍보자료를 내놓다가 회장이 ‘은둔’하는 상황에서 전문경영인들이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요즘엔 이것마저 자제하는 분위기다.
최근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지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1위에 뽑히는 경사를 맞았지만 별도의 홍보자료를 내지 않았다.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된 뒤 기업지배구조 개선 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LG그룹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편. 구본무 회장은 최근 전자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과 함께 경기 파주시 LG필립스LCD 공장을 방문하는 등 현장경영 활동에 나섰지만 이후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것은 꺼리고 있다.
현장경영을 중시하는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추석 직후 울산 현대차 공장을 방문하고 슬로바키아를 방문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으나 10월 들어선 다소 뜸한 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5월 경기 고양시 일산 장애복지시설을 방문해 사회봉사 활동을 한 이후 언론 노출을 자제하고 있다. 그룹 측에선 과거 분식회계와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이 매듭지어지면서 부정적 이미지도 한풀 꺾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LG에서 분가한 GS그룹은 새로운 회사 이미지(CI)를 알리기 위해 공격적인 홍보활동에 나섰지만 허창수 GS홀딩스 회장에 대한 개인 홍보는 많이 하지 않는다.
양대 경제단체 대표인 강신호(동아제약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과 박용성(두산중공업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대외활동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
○ 오너십 위기, 기업가정신 약화로 이어지나
대기업 총수들이 움츠러드는 것은 최근 대기업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경영권 문제에 집중돼 있기 때문으로 재계에선 풀이하고 있다.
A그룹의 한 임원은 “총수의 대외활동이 알려지면 마치 회장이 경영 전부를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비쳐 곤혹스럽다”며 “‘기업인=악(惡)’이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상황에서 회장들이 나서 봐야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전에는 대기업 총수들이 계열사 지분을 많이 갖고 있으면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지분이 낮아지자 이번에는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훌륭한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회장들이 국내에선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문제”라며 “개혁 대상으로 모는 등 대기업 회장들을 너무 심하게 압박해 기업하려는 의욕까지 꺾일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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