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M&A]투기성 외국계펀드 공격 급증…무엇이 문제인가

  • 입력 2005년 3월 28일 18시 08분


코멘트
《“오늘부터 ○○기업의 인수에 나선다. 이 회사 주식을 시가보다 2달러 높은 가격으로 살 테니 주식을 팔 사람은 연락해라.” 1960년대 말 미국에서는 토요일 밤마다 인수·합병(M&A)을 노리는 ‘기업사냥꾼’들이 TV광고와 뉴스 인터뷰 등에 나와 이런 선언을 했다. 그리고 일요일 하루 동안 장외거래를 통해 표적 기업의 주식을 대거 사들여 경영권을 빼앗았다. 주말에 기습을 당한 표적 기업은 방어 전략조차 세우지 못하고 경영권을 빼앗겼다. 당시 월가에서는 기업사냥꾼들의 이런 토요일 기습 공격을 인기 TV프로그램의 이름을 따 ‘토요일 밤의 스페셜(Saturday Night Special)’이라고 불렀다. 기업사냥꾼들의 기습 공격이 문제가 되자 결국 미국 정부가 적대적 M&A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기업 사냥은 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5% 룰’ 등이 도입됐다.》

최근 한국 증시에서도 적대적 M&A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토요일 밤의 스페셜’만큼은 아니지만 ‘단순한 투자 목적’이라며 주식을 사 모은 외국계 펀드들이 “M&A에 나설 수도 있다”고 기업을 위협하는 ‘기습 공격’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로 떠오른 적대적 M&A=지난해 3월 삼성물산 지분 5%를 ‘단순 투자 목적’으로 사들였던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가 12월 M&A 시도 위협을 한 뒤 주가가 오르자 주식을 팔아치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SK㈜와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던 소버린자산운용도 투자 목적을 ‘경영 참여’라고 밝히지 않고 경영진 교체를 시도해 문제가 됐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 당국은 외국계 펀드의 공격에 대응하는 대책 마련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29일부터 ‘5% 룰’이 대폭 강화된다.

‘5% 룰’이란 특정회사 주식을 5% 이상 살 때 이를 공시해야 하는 제도. ‘토요일 밤의 스페셜’ 식으로 몰래 하는 M&A 시도를 막고 기존 경영진에 경영권 방어 기회를 준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이 제도가 29일부터 더욱 강화돼 특정회사 주식을 5% 이상 매입할 때 투자자는 자금의 출처와 투자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단순 투자 목적’인지 ‘경영 참여 목적’인지도 구분해 공시해야 한다.

외국계 펀드의 공격에 대한 재계의 반격도 본격화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는 21일 ‘국내 인수합병 관련 제도의 실태와 보완 과제’, ‘주주 행동주의의 국내외 비교와 정책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외국계 자본의 적대적 M&A 시도를 비판했다.

특히 대한상의는 “외국계 펀드의 국내 기업 투자 및 경영 간섭, M&A 시도 등은 약탈적 주주 행동주의의 표본”이라고 비판하며 정부에 대응책 마련을 촉구했다.

▽적대적 M&A에 대한 두 시각=최근 적대적 M&A의 문제점이 부각된 것은 외국계 펀드가 벌인 공세의 피해가 적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

외국계 기업의 투자와는 달리 외국계 펀드는 근본적으로 국내 기업의 가치를 올리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투자기간이 짧은 데다 투자자금 회수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건 다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최근 브릿지증권을 매각한 영국계 펀드 BIH는 아예 회사 자산을 매각 대금으로 받는 후불제 인수 방식(LBO)을 이용해 회사를 껍데기만 남기고 팔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반면 외국계 펀드의 투기성 행태에 대응은 해야 하지만 적대적 M&A 자체까지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삼성증권 이현정 M&A파트장은 “기존 기업 지배구조가 항상 유지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적대적 M&A를 통해 주주 가치가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기업이 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도 “왜 외국 펀드들이 유독 한국 기업을 표적으로 삼는지 생각해 볼 일”이라며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데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와 대안=제도와 역량을 동시에 보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보호 장치가 상당 부분 사라져 힘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동원증권 ECM부 최상우 차장은 “국내 대기업에 필적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외국계 펀드가 들어오는데 국내 대기업만 공정거래법 등으로 규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미국이 시행 중인 ‘엑슨-플로리오(Exon-Florio)’ 규정 등 다양한 M&A 견제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미국은 1986년 일본 전자회사 후지쓰가 미국 반도체회사 페어차일드 인수를 시도한 뒤 ‘외국인이 미국 기업의 M&A 또는 실질적인 지배로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이 인수를 금지할 수 있다’는 규정을 도입했다.

증권사 관계자는 “1980년대 미국에서 사용됐던 M&A기법이 지금 한국에서 통하는 것은 그만큼 금융제도의 수준이 뒤떨어져 있다는 증거”라며 “당한 뒤에 제도를 보완하지 말고 미리 제도를 갖춰 적대적 M&A의 부작용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관투자가의 역할 강화도 시급하다.

외국계 투기 펀드가 주로 투자하는 기업은 한계상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산이 많아 투자자금 회수가 쉬운 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런 기업에 한국 펀드가 먼저 투자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단기 성향의 한국 펀드도 체질을 개선해 이런 기업에 투자하고 일정 수준의 수익을 올리면서 외국 펀드의 횡포에 대항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김선달 뺨치는 신종 ‘후불제 인수’▼

최근 리딩투자증권이 브릿지증권을 인수하면서 사용한 후불제 인수방식(LBO·leveraged buy out)이라는 인수·합병(M&A) 기법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국 기업을 인수한 외국계 투기자본이 다시 새로운 M&A 기법을 이용해 기업을 팔아 투자자금을 회수한 사례이기 때문.

LBO란 기업을 매수하는 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매수할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빌려 마련하는 방식. 자신의 신용이 아니라 앞으로 인수할 기업의 신용을 기반으로 돈을 빌린 뒤 이 돈으로 기업을 사는 것은 일견 사기처럼 보이지만 실제 가능한 일이다.

LBO는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크게 확산됐다.

담배와 음식료를 만드는 대기업 레이놀즈-나비스코가 기업사냥꾼인 헨리 크라비스 씨에게 250억 달러에 인수된 것이 유명한 사례다. 당시 크라비스 씨는 레이놀즈-나비스코를 인수하면서 인수대금 가운데 190억 달러를 레이놀즈-나비스코 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빌렸다.

브릿지증권을 인수하기로 한 리딩투자증권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리딩투자증권은 인수자금 1310억 원 가운데 1103억 원을 회사를 인수한 뒤 브릿지증권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을 팔아 갚겠다고 밝혔다.

이 계약이 성사된다면 브릿지증권 최대주주인 영국계 펀드 BIH는 보유했던 회사의 자본금을 매각 대금으로 받는 셈이 된다. 반면 브릿지증권은 자본금 2000억 원대 회사에서 700억 원대의 소형 증권사로 전락한다.

시민단체인 투기자본감시센터와 전국증권산업노조는 BIH 등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상태다. 또 금융감독위원회도 조만간 두 증권사의 합병 승인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