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공종식/‘후진국형 정경유착’이 남긴것

  • 입력 2003년 8월 13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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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한국 검찰은 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 중 하나로부터 100억원을 뇌물로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 집을 급습했다.”

대검이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을 긴급체포한 소식을 AP통신은 이렇게 전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 중 하나’, 현대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올 4월 기준으로 현대그룹의 자산규모는 10조2000억원으로 재계 순위 15위. 한때는 8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국내 최대 그룹이었다. 지금은 계열 분리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그룹 등이 떨어져 나갔지만 ‘현대(HYUNDAI)’는 외국에도 잘 알려진 글로벌 브랜드다.

아직 최종 검찰수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내용으로 판단해보면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정경유착 사례로 보인다.

이번 ‘현대 게이트’가 충격적인 것은 현대와 같이 명망 있는 대기업이 후진국형 정경유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외국에도 분식회계 등 대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후진국형 정경유착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IBM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측근에게 거액을 준 혐의로 연방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는 상상하기 힘들다. 기업이 꼭 정치헌금을 하고 싶으면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 결의를 거쳐 제대로 회계처리한다.

국내에서도 1995년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당시 재벌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굴지의 대기업이 권력에 검은돈을 준 혐의로 수사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97년 초 한보그룹 사건 정도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당시 ‘쓴 맛’을 본 대기업들이 조심하게 된 데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내 대기업들의 의식 수준도 높아진 결과였다.

박용성(朴容晟)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그동안 “○○게이트 등의 사건 연루자는 대개 신생기업이나 벤처기업들이지 적어도 30대 기업에서는 없었다. 국내 대기업들이 그사이 많이 투명해졌다”고 자주 말해 왔다. 박 회장은 12일 “이제 더 이상 그 말을 할 수 없게 됐다”며 난감해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외국에서 “한국은 아직도 그 수준인가”라고 비아냥거릴 경우 이제 우리도 박 회장과 마찬가지로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는 ‘국가 브랜드’의 문제다.

낡은 폐습 때문에 정치와 경제가 함께 망가지는 낭패를 언제까지 계속 두고 봐야 할까.

공종식 경제부기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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