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신뢰경영]<12>"사회 기부야말로 최고의 투자"

입력 2003-06-22 17:46수정 2009-10-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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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선사상충증 예방치료제 ‘멕티잔’을 아프리카에 무상 보급하는 머크사의 의료진이 이 병으로 인해 실명 위기에 놓인 아프리카 현지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사진제공 머크
《1978년 미국 제약회사 머크는 새로 개발한 신약 ‘멕티잔’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회선사상충증(흑파리떼에 의해 시력을 잃는 병)을 예방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지만 이 약을 생산하는 것이 회사에는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병은 아프리카에서만 주로 발생하는 풍토병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멕티잔을 구입할 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나 머크는 임상실험, 식품의약국(FDA) 승인 등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고 대량 생산에 나섰다.》

87년 머크는 이 약품을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멕티잔은 4억8000여명의 아프리카인들의 시력을 찾아주었다.

▽기부는 장기 투자=미국 뉴저지주의 화이트하우스 스테이션에 있는 머크 본사를 찾아 레이먼드 길마틴 회장에게 물어봤다.

‘돈이 안 될 줄 뻔히 알면서 왜 10여년에 걸쳐 신약을 개발하고, 또 그 약을 공짜로 나눠줬나.’

레이먼드 회장은 두 가지 이유를 댔다. 하나는 “기부는 장기투자”라는 것. 기부 수혜자 또는 수혜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도움을 주면 언젠가는 이들이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이유는 종업원 만족. “생각해보세요. 직원들에게 인류 건강에 도움을 주는 약품을 만들자고 다짐해놓고 정작 회사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약품 개발을 포기한다면 직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겠습니까.” 길마틴 회장의 설명이다.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기업은 주주들의 이익을 최우선 고려해야 한다. 머크는 지금까지 멕티잔 생산에만 10억5000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아프리카 33개국에 보급하는 비용도 엄청나다. 주주들로부터 반대는 없었을까. 브렌다 코라트렐라 약품기부 담당 이사는 웃으며 “그 같은 질문을 많이 받는다”면서 “주주들이 반대했다면 지금까지 멕티잔 기부를 계속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머크는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최우수(AAA) 등급을 유지하는 8개의 미국 회사중 하나다. 화이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킵 등 경쟁업체보다 덩치는 작지만 주가는 2∼3배 높다. 코트라렐라 이사는 “회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평가가 주가관리에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머크는 87년부터 93년까지 7년 연속 포천지가 선정하는 ‘가장 존경받은 기업’ 1위에 올랐다.

▽핵심역량에 집중=미국 기업들은 기부할 분야를 선정할 때 ‘전략적 투자’ 개념을 도입해 효율성의 극대화를 따진다. 여기저기 참여하지 않고 기업의 핵심역량과 연관된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몰아서 지원하는 것.

머크는 제약회사답게 지난해 총기부액 6억3500만달러 중 91%인 5억7500만달러를 의약품 지원에 썼다. 교육, 문화, 지역활동 등 다른 분야에 대한 현금 기부는 6000만달러로 10%미만이었다.

세계 최대 금융기업인 시티그룹은 금융과 교육이 결합된 자선활동에 집중한다. 뉴욕 본사에 있는 시티그룹 재단의 찰스 레이먼드 회장에게 그룹의 가장 대표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교육재단(NAF)’이라고 답했다.

82년 설립된 NAF는 도심빈민가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금융교육을 시켜주는 프로그램. 여기에 선발된 학생들은 2∼4년 동안 다른 학생들과는 별도의 학급을 구성해 집중적인 금융교육을 받는다. 재테크 교육이 아니다. 졸업 후 취업이나 대학 진학 때 금융분야로 진로를 잡을 수 있도록 실무지식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수학, 회계, 보험, 증권 교육뿐 아니라 금융인답게 옷 입는 법, 악수하는 법, 대화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에티켓 과목도 포함돼 있다. 방학 때는 8주간 지역 은행에서 일할 수 있는 유급 인턴십의 기회가 주어진다.

“빈민가 학생들에게 어려운 금융교육을 시키는 게 성과를 낼 수 있느냐”고 묻자 레이먼드 회장은 “최고경영자(CEO)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직접 NAF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샌디 웨일 시티그룹 회장은 커리큘럼 개발과 주요행사에 꼭 참석해서 다른 기업과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낸다. 시티그룹은 매년 중도포기자 수, 커리큘럼 난이도 등을 기준으로 NAF 운영 학교에 대한 평가를 실시해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학교는 다음해 탈락시킨다.

물론 백화점식으로 다양하게 골고루 지원하는 기업들도 아직 많다. 소비자층이 다양하고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많은 기업들일수록 그렇다. 대표적인 예는 미국 최대 생필품 제조업체 P&G. 의료, 식료품, 미용 등의 분야에서 300여개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기부금의 45%를 교육에 내놓지만 의료(25%), 시민활동(15%), 문화(10%), 환경(5%)에도 골고루 지원한다.


▽네트워크 구축이 성공의 관건=이번 취재에서 만난 전문가들에게 성공적인 기업 기부활동의 조건에 대해 묻자 공통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건 바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기업이 기부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정부,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 지방자치단체 등 다른 협조자들이 해당 지역의 기부 수요를 더 상세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머크의 멕티잔 프로그램의 경우 약품을 만드는 것만큼 아프리카 현지에 보급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보급망 구축에 경험이 없는 머크는 곧바로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아동기금(UNICEF), 카터 센터, 수혜국 보건당국 등 30여개 조직과 협조체제를 구축했다. 머크가 멕티잔 보급을 위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는 그 후 화이자 등 다른 제약회사들이 의약품을 기부할 때도 활용되고 있다. 초기 네트워크는 머크와 WHO의 주도하에 약품을 효율적으로 공급 배분하는데 치중했으나 점차 수혜국으로 리더십이 넘어가면서 자립적인 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무게가 실려졌다.

기부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의 주요 경영진이 이해관계자들의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G의 폴라 롱 지역사회 담당 수석이사는 “임원들이 미국적십자사, 의료기관 등의 이사로 많이 활동한 덕분에 9·11테러 직후 정부의 공식요청이 있기 전에 신속히 필요한 물품을 파악해 지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뉴욕·화이트하우스 스테이션(미국)=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美기업들 한해 130억달러 기부 ▼

샌디 웨일 시티그룹 회장이 지난해 5월 런던 켄싱턴궁에서 열린 ‘전국교육재단(NAF)’ 설립 행사에서 입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런던 NAF는 21년 역사의 NAF가 해외에 처음 세운 분교이다. 사진제공 시티그룹

기부 문화가 가장 잘 발달된 미국에서는 총 기부액 중 기업의 기부가 2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개인이 기부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기업의 기부가 80%다. 이는 한국 기업들의 기부활동이 활발해서라기보다는 개인 기부가 워낙 미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주주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해서 기업의 기부활동은 법으로 금지됐었다. 52년 미법원이 기업 자선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기부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미국의 경영인들 사이에서는 기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최고경영자(CEO)가 기부에 관심이 있으면 자기의 소득으로 할 것이지 왜 주주의 돈(기업의 돈)으로 CEO가 생색내느냐’는 것.

이에 대해 ‘기부가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기업이 기부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기부를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의 하나로 보는 것.

현재는 후자 쪽이 더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경기둔화로 미국 기업들의 기부가 약간 줄기는 했지만 총기부액은 110억∼130억달러(약 13조∼14조원)를 유지하고 있다. 콘퍼런스 보드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가장 많이 기부하는 분야는 교육으로 40% 내외를 차지한다. 의료, 문화, 지역사회, 환경 분야가 뒤를 따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한국도 교육분야 기부가 1위이며 비율도 40%로 미국과 비슷하다. 크게 다른 점은 미국에서는 의료 기부가 총 기부액의 31%를 차지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문화, 지역사회, 스포츠 기부보다 뒤진 0.5%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자선과 기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당시 민주화 물결을 타고 ‘부(富)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자 기업들은 속속 장학재단을 설립하며 기부활동에 참여했다. 수세적 기부였던 것.

90년대 들어 기부활동은 공세적으로 변했다. 기업 활동영역이 커지면서 기부를 사회적 투자와 마케팅 차원에서 파악하게 됐고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늘면서 선진 기업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아직 한국 기업들의 기부활동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수혜 대상을 엄선해 집중적,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보다는 중구난방식으로 펼치는가 하면 1회성 기부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는 것. 전략적 개념이 없는 것이다.

기부 활성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세제 혜택도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국내 공익단체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의 범위는 개인의 경우 소득의 10%, 기업은 5%이다. 미국은 개인은 50%, 기업은 10%이며, 일본은 개인과 기업 모두 25%이다. 미국에서는 81년 세금공제 한도를 5%에서 10%로 늘린 것이 기업 기부활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 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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