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이헌진/IMF 악몽이 떠오른다

  • 입력 2003년 5월 29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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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통가에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때보다 못하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오간다.

이 표현은 재래시장 상인들이 ‘매출이 떨어졌다’는 것을 상인 특유의 엄살로 과장할 때나 등장했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 같다. 푸념으로 흘려 듣기에는 논거(論據)가 점점 구체적이다.

‘IMF 관리체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우울한 징후는 이런 것들이다. 우선 한때 인기를 끌다가 자취를 감췄던 1000냥 하우스, 1만냥 하우스 등 저가균일가(低價均一價) 판매점이 재등장했다.

외환위기 때는 고급 백화점까지 이런 판매를 할 만큼 소비 부진이 심각했다. 아직 백화점에는 이런 게 없고 또 이런 판매 형태를 재개할 계획도 없으나 일반 상가에는 점점 눈에 띈다고 한다.

의류 쪽에 중저가 브랜드 진출이 다시 활발해졌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외환위기 직후 의류업체들은 거품을 빼면서 실속을 강조한 ‘서브 브랜드’ 제품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이런 흐름은 최근 백화점 의류매장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10만원대 신사정장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저가나 B급 상품을 파는 아웃렛 매장이 하나의 유통업태(業態)로 자리 잡을 정도로 급성장하는 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 생활수준이 나빠지거나 악화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상점이 하나둘 비는 듯한 모습도 눈에 띈다.

물론 이런 현상을 두고 ‘실속 소비’의 등장 등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또 29일 발표된 4월 산업활동 동향에서 나타난 53개월 만에 최저 수준의 도소매 판매증가율도 지난해 같은 달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위안해볼 수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 아직은 ‘IMF체제 때’와 비교하기에는 일러 보인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외환위기 때 겪은 고통이 너무 커 ‘학습 효과’에 따른 공포가 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현장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두려움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지레 겁먹은 일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헌진 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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