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부 재정건전성 악화우려]예산검토않고 盧공약강행

  • 입력 2003년 1월 28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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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을 모두 시행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까.

정확한 규모는 전문가들조차 아직 계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공약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재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경제관료들도 거의 이견이 없다. 민간 재정전문가들은 한발 나아가 ‘재정 위기’까지 걱정하고 있다.》

▼돈 얼마나 드나▼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새 정부 공약을 모두 이행하려면 5년 뒤 복지부 예산이 현재(8조7000억원)의 3배가량인 26조원 이상으로 늘어나야 한다. 더구나 이는 노동부나 국가보훈처의 복지예산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올해 교육재정(지방재정 포함)은 30조4636억원으로 예상 국내총생산(GDP) 대비 4.7% 수준이다. 이를 노 당선자의 공약인 6%로 끌어올리려면 2003년 기준으로 8조3562억원을 교육부문에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

교육재정 확대를 5년 동안 단계적으로 추진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경상GDP가 연 8%씩 성장해 5년 뒤 올해의 1.47배가 된다고 가정할 때 교육재정은 지금보다 86% 늘어난 56조6674억원이 돼야 한다.

다른 부문도 ‘증액 일색’이고 지출을 줄이겠다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공무원 보수는 중견기업 수준에 맞춰 인상하고 농림부문 예산은 총예산의 8.7%에서 10%로 늘리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또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행정수도 이전과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을 위해 크게 늘려야 할 처지다.

국방비는 적정수준 보장을, 과학기술 투자는 확대를 약속했다. 문화 관광 수출지원 중소기업지원 안전 건강 환경 통일 외교 등 나머지 분야도 늘리겠다는 방침이지만 설사 줄인다 해도 총액이 교육예산(24조4044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재정수지 전망▼

새로 돈을 쓰겠다는 곳은 많은 반면 재정의 가장 큰 원천인 세수(稅收)는 경제 규모 확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지출 증가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한국사회보험연구소가 작년 11월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을 합한 통합재정수지는 2006년까지 3조∼6조원의 적자를 보이다가 2007년부터 흑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립은 하지만 연금 지급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국민연금의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대규모 흑자(2001년 기준 연간 13조4000억원)가 포함된 것이다. 국민연금은 나중에 가입자들에게 줘야 하는 돈이므로 정부가 마음대로 쓸 수 없다.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을 뺀 통합재정수지는 2003년부터 2017년까지 줄곧 14조∼25조원의 적자를 나타낼 것이라고 사회보험연구소는 예상했다. 적자의 상당부분은 국채를 발행해 메워야 한다.

한국조세연구원 박기백(朴寄白) 연구위원은 지난해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정부 지출을 줄이지 않으면 정부 부채가 2001년 GDP 대비 22.4%에서 2010년 29.1%로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복지 의료 등의 지출이 통제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면 부채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 의견▼

한국의 재정은 △북한 핵문제에 따른 안보비상사태 △경제성장률 하락 △가계부실 심화 △공적자금 상환부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 등 수많은 불안요인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재정의 건전성을 회복해 돌발적인 재정수요에 대비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본보가 서강대 곽태원(郭泰元), 순천향대 김용하(金龍夏), 인천대 옥동석(玉東錫),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유일호(柳一鎬) 교수의 의견을 취재한 결과 이들 전문가 모두가 “재정긴축 및 효율화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와 함께 곽, 김, 옥 교수 등 3명은 “새 정부가 무리하게 공약을 추진하면 재정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답변했다. 유 교수만 “정확하게 계산을 하지 않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인수위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복지예산은 현 정부에서 만들어놓은 제도만으로도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에 접어들었다는 경고도 나온다.

김 교수는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2000년 7%에서 2022년 14%로 급격히 높아질 전망”이라며 “현재의 복지제도만으로도 고령인구가 늘어나면서 복지예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노령화율이 2배가 되면 복지예산이 4배 가까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재정위기 외국사례▼

해외에서도 재정적자를 등한시했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가 많다. 특히 경제 규모에 맞지 않는 무리한 사회 보장비 지출로 재정이 바닥나 마침내 대외채무 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을 하는 나라까지 있다.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인 사례. 1930년대 쇠고기 수출 등에 힘입어 1인당 국민소득이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에 버금갈 정도로 부유했던 아르헨티나는 이른바 ‘페론주의’로 불리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책 때문에 경제가 거덜났다.

부실요인 제거와 경제체질 강화보다는 위기마다 정부 지원카드를 꺼내드는 정책 집행이 30여년간 계속되면서 국가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고 재정은 파탄났다.

2차대전 이후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도 최근 재정적자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3.7%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인 0.5%에도 못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독일의 재정 적자는 예상을 뛰어넘은 ‘통일비용’과 연립정부를 이루는 독일 정치특성상 사회보장비 지출을 줄이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10년간 지속된 장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98년 이후 대량으로 발행한 국채(만기 10년)상환 기일이 다가옴에 따라 재정 파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일본은 국채 상환액이 2002년 75조3400억엔에서 2008년에는 거의 갑절에 가까운 139조4700억엔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조세연구원 박형수(朴炯秀) 전문연구위원은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사회복지 분야 예산 수요가 늘 수밖에 없지만 그 속도를 잘 조정해서 재정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DJ정부 5년 재정상태▼

한국이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등공신은 ‘튼튼한 재정’이었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재정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금융기관들에 재빨리 자금을 지원해 큰 충격 없이 부실기업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공공근로사업 등 각종 실업대책으로 사회혼란을 막을 수 있었던 것도 재정의 기여가 컸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현재 나라살림은 옛날 같지가 않다. 외환위기 후유증과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 늘어난 복지예산으로 재정은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국가채무는 쌓여가고 있다.

어차피 나중에 가입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5개 사회보장성 기금을 뺀 통합재정수지(일반회계+특별회계+47개 기금)는 98년 24조8000억원의 적자를 낸 뒤 △99년 20조4000억원 △2000년 6조원 △2001년 8조2000억원 등 매년 적자를 내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채무도 해마다 늘었다. 가장 ‘보수적’인 국제통화기금(IMF)의 집계방식(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채무합계)에 따르더라도 2002년 9월 말 현재 국가채무는 130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24% 수준. 이는 97년 말 60조3000억원(GDP 대비 13.3%)에서 매년 10조원 이상씩 늘어 5년 남짓 만에 갑절로 뛴 것이다. 여기에 예금보험공사채권에 대한 국가지급보증,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등 공적연금의 잠재적 부채 등을 감안하면 정부가 실제로 갚아야 할 채무는 IMF방식 통계의 4∼7배에 이른다고 재정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는 이런 위험성을 의식해 올해 예산부터는 적자를 내지 않는 균형재정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각 부처가 인수위에 내놓은 각종 공약성 사업을 감당하려면 적자 재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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