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현대重에 1718억 배상”… 서울지법 판결

  • 입력 2002년 1월 25일 17시 59분


지급보증 책임을 둘러싸고 옛 현대그룹 계열사끼리 벌인 수천억원대 소송에서 편법 지급보증을 요구한 계열사는 물론 이에 선뜻 응한 계열사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지법 민사합의17부(전병식·田炳植 부장판사)는 25일 현대중공업이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외화유치 당시 지급보증을 섰다가 입은 2400여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며 하이닉스와 현대증권,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전 회장 등을 상대로 낸 외화대납금 반환 청구소송에서 1718억여원의 지급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현대증권 등이 무효인 각서를 근거로 보증을 요구해 결과적으로 현대중공업에 거액의 손해를 입힌 불법행위가 인정되므로 손해 배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당시 외자를 유치한 현대증권과 이 전 회장 등이 거듭 보증을 요청하면서 ‘문제가 생길 경우 보증회사가 어떤 손실도 입지 않도록 책임지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다고 주장하지만 이 각서는 이사회 결의 등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효력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배상액 산정에 대해 “현대중공업이 이사회 결의 여부에 대한 간단한 문의조차 하지 않는 등각서의 적법성을 따지지 않은 책임도 30% 있다고 보이므로 배상액은 전체 손해액의 70%로 정한다”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은 97년 현대전자가 현대투신 주식 1300만주를 담보로 캐나다 은행인 CIBC로부터 유치한 1억7500만달러의 자금 만기일이 닥치자 당초 지급보증 약정대로 대신 갚아줬으나 현대전자측이 이를 배상해 주지 않자 현대전자와 외자유치를 주관한 현대증권 등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번 판결에서는 최고경영자들이 서명한 보장각서가 있더라도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았으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현대와 비슷한 방법으로 계열사를 동원해 중간에서 지급보증을 서면서 외자를 유치해온 대기업들의 관행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소액주주의 입김이 거세지고, 현대중공업 사외이사들이 나서서 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움직임이 계열사간 소송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판결은 앞으로 주주대표 소송과 집단소송제 도입 등으로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편 하이닉스는 이날 1심 판결에 대해 회사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현대투신 인수를 주도한 현대증권에 대해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곧 항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대중공업은 “일부 승소라는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법원이 앞으로 계열사간 빚 보증을 차단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은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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