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통찰력 임기응변 뛰어난 지도자"- 복거일씨 인물평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30분


복거일(경제평론가·소설가·사진)엊그제 밤 황사로 흐릿한 한반도의 하늘 속으로 큰 별 하나가 스러졌으리라. 예로부터 일러 오지 않았는가. 인걸이 죽으면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진다고.

사람들은 그를 ‘왕회장’이라 불렀다. 그가 세운 회사의 직원들 사이에서 시작됐을 이 호칭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 전체로 퍼졌다. 그 호칭으로 불릴 만한 기업가들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왕회장’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랬다. 그는 ‘왕’이라 불릴 만했다. 그가 ‘현대그룹’이라는 기업 왕조를 창건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세기 전반에 태어난 두 세대의 한국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두 세대는, 불운했던 내 아버지가 속했고 내가 거기 속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두 세대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땅에, 변변한 공장 하나 없고 식민지의 역사와 전쟁의 참상만이 무겁게 덮인 땅에, 현대적 경제를 세우려고 애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는 바깥 사람들의 예측을 깨고.

그 가슴 벅찬 도전에서 정주영은 가장 정력적이고 재능이 크고 대담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들에 대담하게 도전해서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과 임기응변으로 멋지게 해냈고 현대적 공장들을 잇따라 세웠다. 그는 당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었고, 그는 자신의 야망과 재능을 한껏 발휘할 자리를 얻었다. 말을 바꾸면 그는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난 사람만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

그가 임기응변에 뛰어났다는 사실까지도 그가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음을 가리킨다. 그에겐 임기응변으로 고비를 넘긴 일화들이 많다. 겨울에 미군 부대 공사를 하면서, 파란 잔디를 구해서 덮을 수 없느냐는 미군 책임자의 요청에 보리를 옮겨 심어서 미군 책임자가 감탄했다는 이야기부터 흙이 자꾸 물에 쓸려 나가는 공사에서 가마니를 덮어 보라고 했다는 이야기와 제방을 쌓을 때 헌 배를 가라앉혀서 어려운 공사를 끝냈다는 이야기를 거쳐 우리들 모두에게서 탄성을 자아낸 ‘소떼 방북’에 이르기까지.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극심한 혼란과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들이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엔 깊은 생각과 멀리 내다보는 혜안보다는 위기를 극복하는 임기응변의 능력이 생존에 훨씬 큰 도움이 됐다.

물론 그에게 허물과 실패도 있었다. 큰 업적엔 어쩔 수 없이 큰 허물과 실패가 따른다. 그의 실패는 주로 그가 ‘왕회장’ 노릇을 너무 오래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그의 큰 성공은 그에게 권위의 곤룡포를 입혔고 마침내 그의 자신감을 자만심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그는 기업들이 활동하는 사회 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자신의 경영 방식이 늘 통하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누구도 권위의 곤룡포를 입은 그에게 감히 바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가장 큰 실패였던 북한 사업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금강산 관광 사업’도 아마 그의 계산으로는 타산이 맞았을 터이다. 전 같았으면 정부가 치를 대북 수교 비용을 대신 치르는 셈이니 사업 자체의 손실을 다른 이권으로 보충할 수 있었을 터이고 현대그룹 전체의 역량을 동원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에겐 불행하게도 세상은 이미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러시아와의 수교를 위해 정부가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몇십억 달러를 빌려주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시민들은 큰 통일 비용에 고개를 젓고 있었고 기업의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현대그룹의 역량을 대주주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무릇 젊어서 큰 일들을 이루어서 현군 소리를 들으며 오래 통치한 왕들은 이런 위험을 맞게 마련이다. 한무제(기원전 141∼87년 재위)와 루이 14세(1643∼1715년 재위)는 대표적 예들이다. ‘왕회장’이 그들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헐벗은 이 땅에 현대적 경제를 세운 두 세대를 상징했던 기업가가 떠났다. 이제는 발전된 경제 체제에 걸맞게 세련되고 점점 빠르게 바뀌는 사회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기업가들이 나와서 우리 경제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경제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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